믿음이 있어야 구원과 영생, 천국을 얻을 수 있기에 믿음은 보배 중에 보배이며 응답의 열쇠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믿고 천국과 지옥을 확실히 믿는다면 천국을 소망하지요. 소망이 있다면 죄를 버리고 성결되기 위해 힘쓰고 열심히 충성합니다. 이처럼 믿음과 소망은 천국에 가는 그날까지 꼭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럼에도 고린도전서 13:13에 “사랑이 제일”이라고 말씀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 믿음과 소망은 인간 경작을 받을 동안만 필요할 뿐 천국에는 영적인 사랑만 남기 때문입니다. 천국에 가면 그때부터는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이 필요 없으며, 소망 역시 필요치 않습니다. 여러분이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 일주일간 만나지 못했다고 합시다. 나아가 십 년 동안 못 봤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일주일 뒤에 만났을 때와 십 년 후에 극적으로 만났을 때의 감격과 기쁨이 분명 다를 것입니다. 그런데 십 년 동안 그리워하던 사람을 마주하면서도 계속 그리워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진정 믿음이 있고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세월이 흐를수록, 믿음이 장성할수록 천국에 대한 소망이 더욱 커집니다. 시간이 갈수록 주님이 사무치게 뵙고 싶어지지요. 이처럼 천국의 소
우리가 사랑에 위배되는 모든 것을 참다 보면 그에 따른 여파가 오기 마련입니다. 마치 큰 물결이 지나가면 그 뒤를 따라 잔물결이 이는 것처럼 모든 것을 참을 때에도 참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험이 오기도 하고 마음에 고통이 따르기도 합니다. 바로 이런 여파를 견디는 것이 모든 것을 견디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것을 참고 믿고 바라며 견디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로, 연단 중에도 하나님의 사랑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1:7에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땅의 삶이 끝나는 날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추도록 연단을 허락하십니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다 보면 애매히 고난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있구나.’ 하고 믿어야 합니다. 또한 이 사랑을 믿되 끝까지 믿어야 합니다. 믿음의 시련에는 아픔이 따를 수도 있습니다. 고통이 크고 시간이 길어지면 ‘하나님께서 정말 나를 사랑하실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을 것입니다. 이럴
영국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한 묘비에는 이런 글이 쓰여 있다고 합니다. “젊었을 때 이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했지만 이루지 못했고, 황혼의 나이에는 가족을 변화시키려 했지만 이도 이루지 못했는데, 죽음이 가까웠을 때에야 나 자신이 변하였다면 그 모든 것이 변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들은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자꾸만 바꾸려고 합니다. 그러나 상대를 변화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치약을 위에서 짜느냐, 밑에서부터 짜느냐 하는 등의 사소한 습관조차 바꾸지 못해 다투는 부부가 얼마나 많습니까? 상대를 변화시키기 전에 내가 변화되면 됩니다. 그리고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상대가 변화되기를 기대하고 라며 기다려 주면 되지요. 모든 것을 바란다는 것은, 믿는 것이 실상으로 나타날 때까지 기대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말씀을 믿고 말씀대로 이뤄질 것을 바라게 됩니다. 장차 아름다운 천국에서 하나님과 세세토록 사랑을 나누며 살게 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참으며 달려갑니다. 만일 모든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것이 없다면 어떨까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아름답고 행복한 천국에 대한 소망이 없습니다. 이런
상대를 마음 중심에서 사랑하면 모든 것을 믿어 줍니다. 부부간에도 진정 사랑하면 상대를 전적으로 신뢰합니다. 설령 부족한 모습이 보여도 흠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앞으로 변화될 것을 믿기에 사랑스럽게 바라봐 주지요. 반면 사랑이 없는 사이에는 서로 간에 믿음도 없습니다. 늘 판단, 정죄하고 사사건건 다툽니다. 이처럼 믿는다는 것은 상대를 사랑하는 증거이며, 사랑의 크기를 보여 주는 하나의 척도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온전히 믿음으로 하나님의 벗이요, 믿음의 조상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신실한지 생명보다 귀한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실 때에도 즉시 순종했지요. 죽은 자도 살리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믿음을 보시고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2) 하시며 아브라함의 사랑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사랑은 상대를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며,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백 퍼센트 믿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하나님을 믿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다 보면 참아야 할 일이 많습니다. 혈기나 짜증이 나도 참아야 하고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려는 마음도 참아야 합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에 사랑의 개념을 설명할 때도 가장 먼저 ‘오래 참고’라고 하신 것입니다. 마음의 비진리를 버리기 위해 온갖 시련을 참는 자기와의 싸움이 ‘오래 참음’이라면 ‘모든 것을 참는다’는 것은 더욱 깊고 넓은 의미입니다. 오래 참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진리로 일군 후 상대로 인해 겪어야 하는 모든 고통을 참는 것입니다. 즉 ‘영적인 사랑에 위배되는 모든 것을 참는 것’이지요. 바로 비진리, 육, 죄와 악의 모양들을 참는 것을 뜻합니다. 예를 들면, 오래 참지 않는 것, 온유하지 못하고 혈기 내는 것, 교만하고 무례한 것, 자기의 유익을 구하고 성내는 것, 악한 것을 생각하고 불의를 기뻐하는 것을 참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참는다는 것은 억지로 눌러 참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과 반대되는 속성, 곧 모든 비진리를 마음에서 아예 없애는 것입니다. 마음의 할례를 해서 육을 다 벗으면 영적인 사랑만 가득한 영의 사람이 됩니다. 사실 마음을 영으로 일구면 참는다는 표현이 무색해집니다. 하나님을 지
사랑의 속성 중에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것’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과 비슷하지만 차이가 있습니다.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마음에 악은 모양도 품지 않는 것이라면,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것’은 행위로 드러나는 불미스런 일들을 기뻐하지 않으며 가담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잘사는 친구를 보면 시기가 나고 ‘친구는 잘사는데 나는 뭔가? 망했으면 좋겠다.’ 한다면 이는 악한 생각입니다. 그런데 그 친구의 회사가 하루아침에 부도나고 말았습니다. 이때 ‘잘산다고 뽐내더니 고소하다.’며 즐거워한다면 이는 불의를 기뻐하는 것이지요. 나아가 악한 일에 동조하고 가담했다면 적극적으로 불의를 기뻐한 것입니다. 그러면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영적인 사랑을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로, 법을 어기거나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누가 보아도 명백히 잘못이라고 느끼는 불의는 행치 말아야 합니다. 가령, 남을 속이며 옳지 않는 방법으로 부를 축적하거나 법과 절차를 어기면서까지 자신의 이익을 쌓아나가는 것은 불의입니다. 판사가 뇌물을 받고 부당한 판결을 내려 죄 없는 사람이 억울한 처벌을 받았다면 이 또한 불의이지요. 역대하 19
악한 것이란 하나님 말씀에 비추어볼 때 하나님 뜻이 아닌 모든 것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영적인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로, 상대가 잘못되기를 바라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거나 사고가 나기 바라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내 아내가, 남편이, 자녀가 항상 건강하고 잘되기를 원하지요. 그런데 남은 잘못되기를 바라고 상대의 불행을 기뻐한다면 그만큼 내 안에 사랑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사랑이 없으니 상대의 허물이나 약점을 들춰 전하려고 하지요. 남의 말에 솔깃하고 궁금해하는 것은 내 안에 험담과 수군수군하는 비진리의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잠언 17:9에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말씀했습니다. 마음이 선하고 사랑이 있는 사람은 남의 허물을 덮어 주며, 들춰내려 하지 않지요. 또한 남이 칭찬받고 인정받으면 시기 질투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기뻐합니다. 둘째로, 상대를 판단 정죄하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어떤 성도가 크리스천으로서 합당치 않은 곳에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고 합시다. 마음에 악이 있는 만큼 ‘어떻게 저런 곳에
오늘날은 이기주의가 팽배하여 어느 때보다 영적인 사랑이 절실히 요구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 도움이 되는 사람뿐 아니라 자신을 힘들게 하고 피해를 주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의 유익을 먼저 구해 주는 참사랑을 소유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자기 유익을 구치 않는 영적인 사랑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영적인 사랑은 상대 유익을 구하는 것입니다. 일상을 들여다보면 자기 유익을 구하는 사람인지, 아니면 상대 유익을 먼저 구하는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가령, 동료들과 식당에 가서 한 가지 메뉴로 정해야 한다고 합시다. 이때 자신이 먹고 싶은 것을 강력히 주장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상대가 원하는 대로 따라주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이 아니기에 마음이 불편한 사람도 있습니다. 반면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음식이지만 상대가 민망하지 않도록 맛있게 먹는 사람도 있지요. 이처럼 마음에 얼마나 사랑이 있느냐에 따라 행동이 달라집니다. 사랑하면 모든 것을 상대에게 맞춰 주려 하고 자기 유익보다는 상대 유익을 구합니다. 둘째, 범사에 상대 유익을 구하는 사람은 자신이 보기에 좋은 것이 아니라, 상대 마음을 헤아려 맞춰 줍니다. 창세기 13장을 보면 아브라함
많은 사람이 무례히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합니다. 특히 가까운 사람에게 그런 경향이 있지요. 진정 사랑이 있다면 무례히 행치 않습니다. 그러면 무례한 경우의 대표적인 예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하나님께 무례히 행하는 경우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예배 시간에 조는 것, 옆 사람과 대화를 하거나 딴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부족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말해 주며, 설교자에게도 무례한 모습입니다. 예배 도중에 나가는 것도 무례한 일입니다. 예배를 돕는 사명 때문에 나가는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끝까지 자리에 앉아 예배에 집중해야 합니다. 묵도나 사도신경으로 시작해서 축도나 주기도문으로 마칠 때까지 모든 순서를 마음 다해 드려야 하지요. 정성껏 예배를 드리려면 무엇보다 지각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사람들과의 약속시간에 늦는 것도 큰 실례가 되는데 하물며 하나님 앞에 늦는다면 얼마나 무례한 일이겠습니까? 미리 와서 기도로 준비하는 것이 예의입니다.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고 예배드리는 것, 예배 시간에 휴대폰 사용하는 것, 떠들고 장난하는 자녀들을 방치하는 것, 예배 시간에 껌 씹는 것, 음식을 먹는 것도 무례한 일입니다. 예배에
상대가 피해를 주거나 어떤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곧잘 노여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노여움을 겉으로 나타내는 것이 바로 성내는 것입니다. 사랑은 사람 마음을 긍정적으로 만들지만 성내는 것은 마음을 상하게 하고 부정적으로 만듭니다. 마음을 어둡게 하니 하나님 사랑 안에 거할 수 없고 영적 성장도 더딜 수밖에 없지요. 우리가 성내지 아니하는 영적인 사랑을 소유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의분과 성냄의 차이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성내는 것은 격렬히 화를 내거나 큰소리로 욕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얼굴이 굳어지고 안색이 변하는 것, 말투가 퉁명스러워지는 것도 엄밀히 말하면 성내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상대의 표정만으로 ‘화가 났구나.’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마태복음 21장에 보면, 유월절을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상인들은 좌판을 펴고 돈을 환전해 주거나 가축을 사고팝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광경을 보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제사에 쓰일 가축을 내쫓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이들의 의자를 엎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혈기를 내신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좋은 목적이라도 성전을 더럽히
옛말에 ‘양병십년 용병일일(養兵十年 用兵一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즉 병사를 키우는 데는 10년이 걸리지만, 병사를 사용하는 데는 하루밖에 걸리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하루를 쓰기 위해 10년을 준비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도 준비된 일꾼이 필요합니다. 마지막 추수 때가 다가올수록 더욱 절실하지요. 누가복음 10:2에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말씀한 대로 인간 경작이 끝날 시점이 가까워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귀히 쓰임 받는 준비된 일꾼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로, 육신의 생각이 없어야 합니다. 마음에 비진리가 있으면 육신의 생각이 나옵니다. 가령, 공원에 낯익은 남녀가 다정하게 앉아 있다고 합시다. 이때 마음이 순수하고 깨끗한 사람은 그 장면을 선하게 바라봅니다. 반면 불순한 마음이 있으면 “둘이 어떤 사이일까?” 하며 상상의 나래를 폅니다. 심지어 좋지 않은 소문까지 퍼뜨리지요. 자기가 나쁜 행동을 할 마음이 있기 때문에, 상대도 그럴 거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육신의 생각을 버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마
흔히 사람들은 남보다 더 나은 분야가 있으면 그것을 내세워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더구나 자기 자랑으로 넘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느끼든지 전혀 개의치 않고 자신이 가진 것을 드러내 알아주기 원하며 우쭐대지요. ‘자랑’이란 간단히 말해 ‘자기를 드러내는 것, 자기를 내세우는 것’입니다. 자랑을 잘하는 사람은 대부분 다른 사람을 칭찬하는 데에는 몹시 인색합니다. 남이 드러나는 만큼 자신이 가려진다고 생각하니 어찌하든 상대를 깎아내리려고 하지요. 이처럼 자기를 자랑하는 마음은 상대의 유익을 구하는 영적인 사랑과는 너무나 거리가 멉니다. 자기 자랑을 하면 높아지고 인정받을 것 같지만, 진심 어린 존경이나 사랑을 받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시기, 질투를 불러일으킬 뿐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사랑의 항목 중에 ‘자랑하지 않는 것’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드러내 자랑하는 이유는 마음 안에 ‘이생의 자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생의 자랑’이란 자기만족과 쾌락을 위해 자신을 드러내고 우쭐대는 속성으로, 죄악 된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 2:15~16에는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자기 자랑이 많은 사람은 대부분 남보다 자신이 우월하다고 느끼므로 쉽게 교만에 빠집니다. 자기가 잘나서 일이 술술 풀리고 잘되는 줄로 착각하여 우쭐대거나 나태해지기 쉽지요. 그런데 성경 66권을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특히 싫어하시는 악 중에 하나가 ‘교만’입니다. ‘교만’이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지 못하고 무시하는 것, 내가 모든 면에서 우월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교만은 자신보다 못해 보이는 상대 앞에 나타나지만, 심한 경우에는 자신을 가르쳐 주고 이끌어 준 사람이나 질서 상 윗사람까지도 무시할 수 있습니다. “뭘 모르고 저렇게 말씀하시네.”라고 불평하거나 “그 정도는 나도 아는데…” 하며 상대의 말을 잘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사람마다 양심이 다르고 지식도 다릅니다. 이는 보고 들으며 배우고 체험한 것이 다르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지식 중에는 오류도 많고, 스스로 엉뚱하게 입력한 것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굳어지면 자신만의 ‘의’와 ‘틀’이 형성됩니다. ‘의’란 자기가 옳다고 하는 것이며, 이것이 굳어지면서 ‘틀’이 됩니다. 성격이 틀이 되기도 하고 자기가 아는 지식이 하나의 틀이 되기도 하지요. ‘틀’은 사람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