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 유한태 기자]오는 22일은 한·일 국교정상화(수교) 50주년 기념일이다. 1951년 10월20일 시작된 협상이 14년이 지난 1965년에야 마무리됐고 같은해 6월22일 일본 도쿄 총리관저에서 한·일 기본조약과 4개 부속협정 조인식이 있었다. 이후 수립된 이른바 '1965년 체제'는 냉전구도 하의 안보적 협력 필요성과 선진 경제대국인 일본과의 경제적 협력 필요성에 의한 양국관계였다.
안보적으로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국과 일본이 자유진영의 일원으로 북한을 비롯한 공산진영에 대항하는 구도를 이뤘다. 경제적으로는 후진국인 한국이 선진국인 일본으로부터의 경제협력에 의존하면서 경제개발을 꾀하는 구도가 형성됐다.
당시 우리정부는 과거 청산 대가 명목으로 5억 달러 규모의 유무상 차관을 일본으로부터 제공받았고 이 돈은 경제성장의 종자돈 역할을 했다. 이후 50년 동안 양국간 인적 교류와 경제 교역 및 규모 역시 확대됐다.
양국간 방문객 수는 연간 1만명에서 근래 500만여명으로 늘었고 교역 규모도 1965년 당시 2억4000만달러에서 1000억달러 대로 증가했다.
그러나 1965년 체제는 안보적 측면과 경제적 필요성이 우선시된 한일간의 과거사를 청산하는 문제와 일본군 위안부와 강제징용 피해자 등 일제강점기 개인 피해자에 대한 보상 문제가 소홀히 취급됐다. 독도 문제도 정리되지 못했다.
이 같은 한계가 갈등의 씨앗이 돼 양국관계는 지난 50년간 전진과 후퇴를 반복해왔다. 박정희정부 시절 김대중 납치사건(1973년), 재일 한국인 문세광에 의한 대통령 저격미수 사건(1974년) 등으로 양국 관계가 악화됐다. 전두환정부 시절에는 일본 교과서 왜곡 문제로 외교적 마찰이 빚어졌다.
김영삼정부 때는 고노 담화(1993년)와 무라야마 담화(1995년)라는 성과가 있었지만 일본 고위인사들의 망언도 있었다. 김대중정부 때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참배가 있었고 노무현정부 때는 일본 시마네현의 '다케시마의 날' 제정 등 독도 도발이 있었다.
한·일 관계가 결정적으로 악화된 것은 이명박정부 시절이다.
이명박정부 들어 2011년 12월 교토 정상회담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로 양국 정상이 충돌했고 2012년 8월 이 대통령이 독도를 전격 방문하면서 양국 관계는 급속히 악화됐다. 박근혜정부 들어서도 양국 정상이 다자회의에서 몇차례 대화를 나눴을 뿐 정상회담은 열리지 않고 있다.
이 같은 관계 악화는 우익성향의 일본정부 탓이란 분석이 지배적이다.
일본정부는 북한 핵·미사일 문제와 중국의 대두를 외교안보적 위협으로 인식하면서 1990년대 중반부터 보수우경화됐다.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나 남쿠릴과 센카쿠 등 영토·해양문제, 야스쿠니 신사 참배와 위안부 등 과거사 문제에 대해 경직된 태도를 보였다.
고이즈미 총리나 아베 총리는 국민여론을 배경으로 공세적 외교를 전개했고 이 과정에서 우리뿐 아니라 중국과도 마찰을 빚었다.
특히 아베 총리는 내치(內治)수단으로 우리나라를 비롯 중국과의 영토 및 역사 문제 등을 교묘하게 활용하는 전략을 구사하는 방식으로 동북아지역의 갈등을 심화시켜온 것이다.
일본정부의 우경화 속에 한일 관계 전반은 더욱 악화되는 모양새다. 일본 내 한류의 기세가 주춤해졌고 서점에서는 혐한류 잡지 등이 팔려나가고 있다. 한국을 찾는 일본인 여행자가 크게 줄어들고 있는데도 이같은 기류가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일부 우익을 중심으로 헤이트스피치 행위 역시 횡행하고 있다.
이런 상황탓에 일각에선 한·일 양국관계가 2차 세계대전 이후 최악이라는 평도 나오고 있다. 문제의 핵심인 일본군 위안부 피해 문제는 이미 한·일 갈등의 상징이 돼버렸다.
때문에 아베정부의 역사인식에 변화가 없는 한 양국 관계 개선은 요원하다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더불어 우리정부의 대응 역시 전략적 유연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이는 동북아 지역에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것은 물론 오바마 체제아래서 최근 한미 관계에도 부정적 영향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따라서 경직된 양국 관계가 어떤 식으로든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는 지적이 외교가 안팎에서 커지고 있는 실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