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 강신철 기자]이른바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이라 불리는 '유서대필 사건'으로 옥살이를 한 강기훈(52)씨가 재심 상고심을 거쳐 24년 만에 무죄 확정 판결을 받았다.
대법원 2부(주심 이상훈 대법관)는 14일 '유서대필 사건'의 당사자 강씨에 대한 재심 상고심에서 강씨에게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이에 따라 강씨는 1991년 5월 사건이 발생한 지 24년 만이자, 재심을 청구한 지 7년 만에 무죄가 확정됐다.
대법원은 판결문에서 "강씨의 필적과 이 사건 유서의 필적이 동일하다고 판단한 1991년 국립과학수사연구소(국과수)의 감정 결과는 신빙성이 없어 그대로 믿기 어렵고 나머지 증거만으로는 강씨가 유서를 대필해 자살을 방조했다는 공소사실이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증명되지 않았다고 본 원심은 정당하다"고 판시했다.
'유서대필 사건'은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던 1991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총무부장이었던 강씨가 후배 김기설(당시 전민련 사회부장)씨에게 분신할 것을 사주하고 유서를 대신 써준 혐의(자살방조)로 옥살이를 한 것을 말한다.
노태우 정권은 1991년 5월8일 김기설이 서강대 본관 옥상에서 분신한 뒤 투신해 숨지자 그 배후로 강씨를 지목, 국과수 필적 분석 결과를 내세우며 그를 구속기소했다.
당시 법원도 '유서의 필적은 김씨가 아닌 강씨의 것'이라는 국과수 감정 결과를 근거로 강씨의 자살방조 혐의에 대해 유죄라고 판단했다. 또 이적표현물 소지 등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까지 더해 징역 3년에 자격정지 1년6개월을 선고했다. 강씨는 1994년 8월17일 만기출소했다.
사건 발생 16년 만인 2007년 11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이 사건에 대해 "강씨가 아닌 김씨가 유서를 직접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며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고, 법원도 재심 개시를 결정했지만 검찰의 재항고와 3년이 넘는 대법원의 장고 끝에 재심은 2012년 10월19일에서야 최종 결정됐다.
재심을 담당한 서울고법은 지난해 2월 김기설이 분신자살을 하며 남긴 유서의 필적이 김기설 본인의 것이 아니라 강씨의 필적이라고 판단한 1991년 국과수의 감정결과는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 강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검찰은 이에 불복해 상고했다.
결국 이날 김창석 대법관이 "검사의 상고를 기각한다"는 주문을 읽으면서 강씨는 24년 만에 완전히 누명을 벗게 됐다. 주문 낭독 외에 별다른 의견 표명은 없었다.
간암을 앓고 있어 건강이 좋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 강씨는 법정에 나오지 않았다. 강씨 대신 '강기훈의 쾌유와 명예회복을 위한 시민모임' 회원 등 20여 명의 시민들이 법정에서 강씨의 무죄 확정 판결을 반겼다.
이들은 선고 직후 기자회견을 열어 "너무나도 당연한 판결을 얻어내기까지 길고 긴 치욕과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며 "부당한 국가권력의 날조와 조작에 대해 정부는 정중히 사과하고 이에 가담했던 사법부와 검찰은 다시는 이와 같은 '거짓말 잔치'가 벌어지지 않도록 대안을 제시하라"고 촉구했다.
강씨의 변호를 맡은 송상교 변호사는 "강씨가 과연 '문제의 유서를 대필했느냐'는 간단한 사건을 두고 이렇게 오랜 시간 공방을 벌였다"며 "이 사건은 '유서대필 조작사건'으로 불려야 하고, 사건을 조작한 국가의 책임을 묻는 작업을 (강씨와) 상의한 뒤 계속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