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 강철규 기자] 나이지리아 대선 사상 최초로 야당 후보로서 현직 대통령을 누르고 승리한 무하마두 부하리(72)는 3번의 대선 실패를 극복하고 4번째만에 대선 승리를 이룬 집념의 소유자다.
지난 대선에서도 남부 니제르 델타 출신인 굿럭 조너선 대통령과 맞붙어 패배를 기록했지만 이번에 보기 좋게 설욕한 셈이다.
이번 승리는 야당 진영이 하나로 뭉친 범진보의회당(APC)의 후보로 나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APC는 1999년 나이지리아에서 군정이 종식된 후 나이지리아 정계를 장악해온 인민민주당(PDP)의 거물들이 대거 탈당, 야권에 합류함으로써 승리가 점쳐졌었다.
부하리는 나이지리아 북부의 빈민층 사이에서 항상 높은 인기를 누렸었다. 특히 이슬람 무장단체 보코하람의 준동을 막기 위해 군 장성 출신인 그의 규율 강조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돼 왔다.
카트시나주 다우라 출신의 무슬림인 부하리는 북부 지역에 샤리아를 도입하는 것을 지지했지만 자신이 이슬람 급진주의자는 아니라고 말해 왔다. 지난 2003년 대선에서는 샤리아 도입 주장으로 기독료도들로부터 표를 얻은데 실패해 낙선했었다.
지난해 7월 카두나에서 보코하람의 암살 기도 공격을 받았지만 살아남았고 이후 대통령에 당선되면 보코하람을 격퇴시킬 것을 다짐했다.
그는 조너선 대통령이 보코하람에 대응하는데 미약하다고 비난해 왔으며 보코하람과는 대화할 수 없다고 대화를 거부해 왔다.
부하리는 1983년 12월 쿠데타를 일으켜 1984년 1월부터 1985년 8월까지 나리지리아를 통치하기도 했었다. 이 기간은 기강 해이 및 부패와 전쟁을 벌였던 시기로 기억되고 있으며 동시에 인권 유린이 자행된 시기로 군부 통치의 탄압이 이뤄진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이지리아 정계 및 군, 민간인들 사이에 부하리는 정직한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다.
하지만 언론의 자유를 제한하는 악명높은 법안을 도입했으며 재정의 균형을 맞춘다며 수입을 억제함으로써 많은 일자리를 사라지게 만들고 기업들의 도산을 부르기도 했다. 또 부패 방지를 위해 화폐 개혁을 실시했는데 이로 인해 물가가 오르고 생활이 어려워지면서 1985년 8월27일 이브라힘 바방기다의 궁정쿠데타로 실각, 40개월의 징역형에 처해졌었다.
한편 그가 1983년 12월31일 일으킨 쿠데타 때문에 민주주의에 대한 부하리의 의지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올루세군 오바산조 전 나이지리아 대통령은 부하리에 대해 "뛰어난 경제 관리자는 아닐지라도 강력하고 완강하며 단호하고 용기있는 지도자라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