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옷을 입은 여인의 저주, 국내 초연 호러연극 ‘우먼인블랙’
공포는 보이지 않는 어둠에 대한 인간의 상상에서 출발한다. 귀신의 실체나 선혈 낭자한 시체를 보지 않더라도 우리는 극도의 공포심을 느낄
수 있으며 오히려 마주하지 않았을 때 두려움은 더욱 배가된다. 처음으로 한국무대에 올려진 연극 ‘우먼인블랙’은 여기저기서 귀신이 출몰하며
겁을 주는 대신 관객의 상상력에 많은 부분을 의지한 ‘고급스런’ 미스터리 호러 스릴러다. 자 이제 상상하라, ‘검은 옷을 입은 여인’의
저주가 시작된다!
서서히 쌓아올리는 공포
중년의 법무관 아더 킵스(이호성 分)는 젊은 시절 자신이 겪은 유령 경험담을 가족과 친구들 앞에서 연극으로 보여주기 위해 젊은 배우(이상직
分)와 준비를 해나간다. 자신의 모든 고통을 하나도 빠짐없이 얘기함으로써 마음의 평화를 구하고자 하는 킵스는 당시 주변 인물들로 분하고
연극배우는 킵스의 젊었을 때 모습을 연기한다.
젊은 법무관 킵스는 죽은 드라블로우 부인의 유산을 정리하기 위해 ‘크라이신 기포드’라는 마을로 파견된다. 그곳에서 그는 드라블로우 부인의
변호사라는 이유만으로 마을 사람들로부터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 되고, 그러던 중 장례식에서 검은 옷을 입은 수척한 여인을 만난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여인. 킵스는 드라블로우 부인의 음산한 저택에서 무서운 경험을 하게 된다.
연극은 막을 내리기 직전까지 서서히 차곡차곡 공포를 쌓아 올린다. 장작더미처럼 포개진 긴장은 결말부분에서 불처럼 일어나고 마지막 반전을
통해 정리되면서 ‘찝찔한’ 여운을 남긴다. 처음 시도된 이 호러극은 관객의 바로 코앞, 스크린 따위의 ‘장애물’ 없는, 연극의 특징을
십분 활용해 영화와는 또다른 공포를 선사한다.
조명과 음향 일등공신
‘우먼인블랙’은 조명과 음향의 비중이 어느 연극보다 크다. 객석까지 환하게 불을 켜놓고 시작한 연극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어두워지고
급기야 손전등과 촛불을 이용한 국소적 불빛을 활용하면서 공포감을 절정으로 몰아간다. 또한 빛과 어둠의 분배를 통해 킵스가 연기하는
다양한 배역을 구분하고, 이렇다할 변함 없는 무대를 달라 보이게 하는 ‘착시’현상마저 도모한다. ‘우먼인블랙’의 진정한 주인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조명’은 관객의 ‘무서운’ 상상을 위한 일등공신이다.
음향도 조명에 버금가는 임무를 수행했다. 예기치 못한 큰 볼륨으로 갑자기 흘러나오는 사운드는 그것만으로도 관객을 놀래키기 충분하다. 또,
조용한 어둠 속 저 멀리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나지막한 소리는 혼자 있는 방안, 시계의 초침소리가 유달리 크게 들리고 긴장을 증폭시키는
것처럼 관객의 고동을 빠르게 한다.
소극장이기에 큰 제약이었을 배우의 동선과 세트의 활용도 뛰어나다. 무대의 모서리, 무대와 객석 사이의 공간, 때로는 객석까지 이용하며
배우들은 좁지만 넓게 움직이고, 세 개의 문을 들락날락 하면서 공간전환을 꾀한다. 한쪽 문으로 나간 배우가 다른 문으로 들어오는 그 짧은
순간, 무대는 좀 전과는 다른 장소로 이동돼 있다.
1인다역, 배우들의 연기 압권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두 주연배우의 연기력이 ‘우먼인블랙’의 최고 장점이다. 단 두명이서 1시간40분가량을 꾸려나가는 동안 자칫하면 단조롭고
지루할 수도 있는 위험을 그들은 잘 뛰어넘었다. 하기사 이미 영화 ‘초록물고기’와 연극 ‘세자매’ ‘살아있는 이중생 각하’ 등으로
대중과 평단으로부터 인정받은 30년 경력의 중견 이호성과 연극 ‘문제적 인간 - 연산’에서 순수와 광기의 완벽한 조화를 이뤄냈던 이상직
아닌가.
특히 이호성은 아더 킵스 역외에 극 중 극에서 1인6역을 맡으며 카멜레온 같은 연기를 선보이며 빠른 전환력과 뛰어난 순발력을 유감 없이
과시했다. ‘연기 초보’ 킵스가 연기하는 것임을 감안한다면 도리어 사실감이 떨어질 수도 있는 부분이지만 어쨌거나 이호성의 연기와 흡입력
있는 목소리는 정말이지 으뜸이다.
이상직도 연극배우와 점차 공포에 물들어가는 젊은 킵스 역을 훌륭하게 표현했다. 감정전환의 템포가 조금 빨랐으면 하는 아쉬움과 아직 경직돼
있다는 느낌이 들지만 나무랄 데 없는 호연을 펼쳤다.
‘우먼인블랙’은 관객에게 ‘상상할 것’을 권한다. 몇 번이고 배우가 아더 킵스에게 “상상력을 발휘해봐요 킵스씨. 우리의 상상력”이라고
강요하는 것은 실제로는 관객들을 향한 요구다. 안개 자욱한 드라블로우 부인의 저택, 간조 시에만 보이는 길, 훈련견 스파이더 그리고 허물어진
묘비들…. 상상력을 발휘하면 그 모든 것이 보인다. 그리고 상상하는 자만이 100%의 전율을 느낄 것이다. 단 마지막 반전은 상상하지
마라. 뻔한 감이 없지 않지만.
(3월28일까지 / 제일화재 세실극장 / 02-3291-3700)
안지연 기자 moon@sisa-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