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 김정호 기자]경찰의 DNA 수사가 자칫 미제 사건을 남을 뻔한 강력 사건을 해결하는 중요 열쇠가 됐다. 서울 도곡동 80대 재력가 할머니를 살해한 60대 남성이 사건 발생 12일 만에 경찰에 붙잡혔다.
10일 서울 수서경찰서에 따르면 지난달 25일 오후 수십억 원대 재산을 가진 함모(88)씨가 서울 강남구 도곡동 자신의 집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발견 당시 함씨는 차려진 밥상을 앞에 두고 양손이 운동화 끈으로 묶인 채 누운 상태였고, 목에는 졸린 흔적이 발견됐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밥상이 차려져 있고, 외부침입 흔적이 없던 점 등을 미뤄 면식범의 소행일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판단하고 수사를 진행했다.
경찰은 우선 현장을 보존한 채 함씨를 묶었던 끈 등 증거가 될 만한 각종 단서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으로 보내 분석을 의뢰했다. 이후 함씨의 친척과 주변 지인들을 차례로 불러 함씨의 범행 전 행적 등 수사의 도움이 될 만한 진술을 확보했다.
하지만 함씨 집 앞에 폐쇄회로(CC)TV가 설치돼 있지 않은 점과 통화내역, 주변인물 조사 등으로 용의자를 특정하기 어려웠다.
당시 용의자의 윤곽조차 밝히지 못한 채 사건은 미궁으로 빠지는 것처럼 보였다. 또 경찰 안팎에서 수사 장기화를 비롯해 미제로 남는 것이 아니냐는 곱지 않은 시선도 적지 않았다.
지성이면 감천. 경찰은 국과수로부터 용의자로 추정되는 DNA를 확보했다는 통보를 받았다. 이때부터 엉킨 실타래가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범행현장에서 DNA를 검출할 수 있는데 DNA를 검출했다고 해서 범인을 잡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할머니 시신에서 나온 DNA가 경찰이 보관해놓은 범죄자 DNA와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후 경찰은 함씨 주변 인물을 일일이 면담하며 DNA를 채취해 대조·분석 작업을 병행했다. 그 결과 정모(60)씨가 과거 세입자라는 사실과 알게 됐다. 또 국과수로부터 함씨를 묶었던 끈과 함씨의 양손 손톱, 콧잔등, 입술 등에서 나온 DNA가 모두 정씨의 DNA와 일치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이에 경찰은 지난 9일 과거 세입자였던 정씨를 용의자로 지목해 긴급 체포했다.
경찰 관계자는 “함씨의 시신 콧잔등과 입술의 DNA는 손으로 함씨의 입을 틀어막는 과정에서 묻은 것으로 보인다”며 “손톱의 DNA는 함씨가 반항하면서 정씨를 붙잡고 당길 때 남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뚜렷한 증거를 찾지 못해 자칫 미제의 사건으로 남을 뻔한 강력 사건을 경찰이 과학수사로 통해 해결한 것이다. 정씨는 검거 당시부터 혐의를 극구 부인하다가 DNA 검사 결과 등을 내민 경찰의 끈질긴 추궁 끝에 범행 일체를 시인했다.
이에 대해 이수정 경기대학교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모든 범죄는 흔적을 남긴다”며 “우리나라 경찰 DNA 수사 수준은 이미 세계적인 수준으로 강력 사건을 해결하는데 중요한 수사 기법”이라고 평가했다.
이 교수는 이어 “현재까지 정씨의 단독 범행인지 공범이 있는지 확인되지 않았다”며 “경찰은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증거를 바탕으로 정씨의 범행 동기와 공모 여부 등을 밝혀내야 한다”고 덧붙였다.
한편 경찰은 이날 정씨에 대해 살인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하고, 정씨를 상대로 구체적인 범행 동기와 공모 여부 등을 집중적으로 추궁하고 있다.
서울 수서경찰서는 수십억 원대 재산을 지난 80대 할머니 숨지게 한 정모(60)씨에 대해 살인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고 밝혔다.
정씨는 지난달 25일 오후 4시50분께 서울 강남구 도곡동의 한 주택 2층 방에서 함모(88) 할머니를 숨지게 한 혐의를 받고 있다.
경찰 조사결과 정씨는 2002년부터 5년 동안 함씨의 도곡동 2층짜리 주택에 살던 세입자로, 함씨와는 25~30년 전부터 알고 지내온 사이인 것으로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