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 김정호 기자]“갈 곳을 찾지 못한 노숙인들이 마지막으로 모이는 곳이 서울역입니다.”
지난 15일 오후 7시께 서울역전우체국 앞 지하보도에 남루한 차림의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들은 응급대피소에서 하룻밤을 나기 위한 노숙인들로 수십 여분 만에 100여명을 훌쩍 넘겼다.
대피소 입구에 놓인 대장에 이름 등을 적은 이들이 하나 둘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입장이 중단됐다. 대피소에 들어가지 못한 이들은 예상했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발길을 돌렸다.
시설에 들어가지 못한 김호성(50·가명)씨는 "조금만 늦게 줄을 서면 들어갈 수 없어 그냥 밖에서 잘 수밖에 없다"며 "오늘은 어디서 밤을 보내야 할지 막막하다"고 내뱉고는 지하보도 주변을 맴돌았다.
그는 "춥다"는 말을 반복하며 술을 찾았다. 동대문구 일대에서 노숙생활을 하다 추위를 피하기 위해 2년 전 서울역으로 옮겨왔다는 김씨의 입에서는 술 냄새가 진동했다. 취기에 눈도 풀려있었다.
한참을 서성이던 김씨가 대피소의 문을 열자 한 관리 직원이 "만석이라 자리가 없다"라며 막아섰다. "재워달라"며 몸을 들이밀던 김씨는 밖으로 밀려났다. 김씨에 이어 대피소의 문을 연 노숙인 2명도 금세 떠밀려 나왔다.
한파가 시작된 이후 매일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서울역에 마련된 노숙인 응급대피소의 수용인원이 120명에 불과한 데 반해 몸을 뉘일 곳을 찾아 모여든 이들이 급증한 탓이다.
노숙인 수용소에서 하룻밤을 잘 수 있게 된 노숙인들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92㎡(28평) 남짓한 방은 머리를 맞대고 누워 있는 노숙인들로 빼곡했다. 어깨 하나 들어갈 너비의 통로 외에는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가습기와 환풍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릴 정도로 고요했다.
24일 서울시에 따르면 지난해 10월 기준 서울의 거리 노숙인은 880여명. 이중 절반에 가까운 390여명이 서울역 인근에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노숙인이 서울역 인근으로 몰려드는 가장 큰 이유는 '숙소' 때문이다. 서울에 있는 노숙인 시설 51곳 중 노숙인들이 제약 없이 드나들 수 있는 곳은 서울역과 영등포역 일대의 6곳에 불과하다. 나머지 지역의 시설은 입소 규정이 까다롭다.
대다수 시설이 노숙인 입소 규정을 까다롭게 하는 것은 이들의 자활을 돕기 위해서다. 음주 여부를 측정해 술을 마셨을 경우 절대 들여보내주지 않는다.
서울의 한 지구대에서 근무하고 있는 경찰이 "새벽에 술 취한 노숙인을 데리고 쉼터에 찾아가 하룻밤만 잘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지만 거부당해 결국 서울역으로 보냈다"고 말할 정도로 엄격하게 통제된다.
서울시 자활지원과 관계자는 "인프라가 부족하다 보니 시설들은 자활 의지가 있는 노숙인을 돕는데 집중하고 있다"며 "거리 노숙인의 보호는 서울역과 영등포역 등의 보호시설에서 전담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거리 노숙인들을 서울역과 영등포역 인근에 몰아 보호하는 중앙 집중식 정책이 행정 편의적인 임시방편인 데다 자활에도 오히려 악영향을 준다는 비판이 나온다.
시민단체 '홈리스 행동'의 이동현 대표는 "동사 방지를 위해 노숙인들을 밀집지역으로 몰아넣는 데에 인력과 예산을 투입하다 보니 정작 장기 노숙인들의 자활은 더욱 힘들어지고 있다"고 꼬집었다.
이 대표는 "자활시설에 들어가지 못한 대다수 노숙인들은 밤에 서울역을 찾아 추위를 피하고 낮에 연고 지역으로 돌아가거나 서울역에 머무는 악순환을 반복하고 있다"며 "상담 기회가 제한적이다 보니 노숙기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주거지 우선' 노숙인 지원 정책을 펼치고 있는 영국과 미국 등의 사례를 들며 '시설 중심'인 우리나라의 노숙인 정책은 시작부터 잘못됐다고 지적했다.
이 대표는 "영국과 미국 등은 지역 자치단체가 주소지를 부여해 임시거처를 마련해준 다음 이들이 지역사회에 융화될 수 있도록 한다"며 "자활은 지역사회에 융화된 다음에 추진해야 효과적"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서울시도 '희망온돌' 등 노숙인에게 필요한 복지 서비스 체계가 있다"며 "구청에서 컨테이너 두 개만 제공해도 이곳에서 노숙인 상담 등을 진행하며 효율적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