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 이상미기자] "오랫동안 (현장의) 뒷바라지 역을 하다 다시 무대에 오르게 됐는데 그간 공백기를 가진 게 아닌 것 같아요. 마치 20대 때 처음 연기를 시작했을 때 그런 기분입니다. 나름대로 데뷔하는 기분으로 임하고 있어요."
연극 '홀스또메르' 연습 현장에서 만난 유인촌(63)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채 싱글벙글 웃었다. 머리는 하얗게 샜지만, 연기를 향한 초심은 그대로다.
1971년 연극 '오델로'로 데뷔한 유인촌은 1974년 MBC 탤런트가 된 뒤 '전원일기' 등으로 인기를 누렸다. 중앙대 강단에 서다가 2004년 이명박 서울시장 시절 서울문화재단 초대 대표이사를 지냈다. 2008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으로 임명됐고 역대 최장수 문화장관으로 기록됐다.
지난해 4월 연극 '파우스트-괴테와 구노의 만남'을 통해 배우로 복귀했다. 공직에서 물러나 8년 만에 배우로 컴백하는 작품으로 주목받았다. 지난해 12월 이 연극의 앙코르 공연에도 출연했다.
하지만 '파우스트'는 낭독극인만큼 본격적인 연기 재개는 이번 '홀스또메르'가 시작이다. 그는 2005년 이 연극과 영화 '가능한 변화들' 이후 공직으로 '외도'를 했다.
러시아 문호 레프 톨스토이의 중편소설 '어느 말 이야기'를 극작가 마르크 로조프스키가 각색한 작품이다. 한때 촉망받는 경주마였으나 지금은 늙고 병든 말의 입을 빌려 인생의 희로애락을 이야기한다. 말의 회상을 통해 삶의 의미를 되짚어본다. 산다는 것에 대한 통찰이다.
유인촌은 늙은 말 '홀스또메르'를 연기한다. 혈통 좋은 말이나 몸에 있는 얼룩 탓에 사랑에 실패하고 급기야 거세까지 당하는 명마다. '세르홉스끼 공작'을 만나 기쁨을 누리지만 결국 늙고 병든 초라한 말로 전락한다.
유인촌이 이끌던 극단 유가 1997년 이 작품을 국내 초연했다. 그만큼 그에게 각별한 작품이기도 하다. 벌써 이번이 다섯번째인데, 연기할수록 애틋해진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이야기에요. 초년기를 거쳐 전성기에 이르고 그러면 정년이 되고…. 세상이 변해도 변하지 않을 메시지를 담은 작품이죠. 97년도만 해도 기운이 넘칠 때니까 기운으로 했죠. 이제는 정서적으로 할 나이가 충분히 됐습니다."
주변 또래들 중 일하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극에 더욱 공감하는 이유다. "그래서 홀스또메르의 더 많은 부분이 공감돼요. 젊어서 잘 나가다 아무 쓸모 없는 삶이 됐을 때 많은 게 느껴지죠. 어떻게 늙어갈 것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게 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초연 당시 인상 깊었던 에피소드도 있다. "당시가 IMF였죠. 자살하고자 했던 청년 실업가가 이 작품을 보고 다시 살아야겠다는 희망을 가졌다고 장문의 편지를 보냈어요. 그런 부분이 제게 굉장히 힘을 줬죠. 그게 마음에 아직도 남아 있어요. 올해가 또 말의 해이기도 하고. 여러가지 의미가 겹쳐서 작품에 대한 애착이 더 크네요. 좋은 작품이 흥행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간절함도 있습니다."
공직을 거친 뒤 혹시 연기관에 변화가 생겼다. "이제는 화려하게 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는 것이다. "작은 것에 숨어 있는 진실, 그 진정성을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이다. "많은 것을 생략하고 압축하고 싶죠. 예전에는 뭔가 더 많은 것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이제 감추고 싶은 것이 많아요. 무대는 배우의 역이 커요. 기계의 도움이 가능한 것을 제 몸으로 표현하는 거죠. 그런 원초적인 생각을 하고 있어요."
자신이 연극을 하던 1970년대 초나 지금이나 어려운 연극계 현실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유인촌은 그러나 이 현실을 조금이나마 바꾸기 위해 꾸준히 노력을 해왔다. 비록 이틀이었지만, '홀스또메르'를 지난해 11월 전남 해남 문화예술회관에서 먼저 선보인 것이 그 예다.
"물론 지역 연극계에서 활동하는 좋은 분들이 있지만, 그 숫자가 적죠. 문화와 예술은 서로 자극하는 것이 필요해요. 지금은 서울이 중심인데 전국적으로 더 많은 교류를 할 수 있는 게 필요하죠. 그래서 나라도 먼저 내려가자는 생각을 했어요. 지방은 돈을 벌 수 없는 구조라 아직 서울 공연이 주지만, 점점 지방 공연의 횟수를 늘리려고 하고 있어요. 언제가는 서울 사람들이 지역에 공연을 보러 오는 구조를 만들고 싶습니다."
연극은 배우뿐 아니라 작가, 연출가, 스태프 등 사람에 대한 투자가 중요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결국은 무대를 많이 제공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설명이다. 아직 "그런 부분이 미흡하다"고 짚었다.
"대학로에 소극장이 많지만, 그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게 정책적으로 보완이 필요해요. 고생을 하더라도 정상이 보이면 덜 힘든데 그것이 없죠. 영화나 드라마에 나와야 비로소 성공한 느낌이 들고. 그런데 연극은 영화, TV와 의미가 달라서 그것을 성공으로 볼 수 없어요. 본질이 다르죠. 연극은 좀 더 종교적이라는 생각이에요.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가장 직접적으로 투명하게 거울처럼 전달하죠."
작품의 반은 관객이 완성시킨다는 믿음이다. "관객의 역할이 정말 중요해요. 저는 '눈을 부릅뜨고 본다'고 표현하는데, 그렇게 보면 연극이 나빠질 수 없어요. 예전에는 이대 앞에서 전단지도 많이 뿌렸는데 이번에도 기회가 되면, 그렇게 하고 싶어요. 쇼가 아니라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차원이죠."
연극을 통한 청소년 예술교육에 관심이 많은 유인촌은 '홀스또메리'를 마치면, 소년원이나 청소년 쉼터에서 연극을 교육할 마음이 있다. 이와 함께 소아암·백혈병에 걸린 아이들을 위해 부산에서 국립암센터가 있는 경기 일산까지 자전거를 타고 후원금을 모으는 캠페인도 검토 중이다. 앞서 '홀스또메르'의 일부 객석을 청소년을 위해 기부한다.
연기와 함께 여전히 더 나은 세상을 고민하는 그에게 다시 공직 제의가 올 수도 있다. "나이도 있고, 다시 배우로 시작한다는 마음 때문에 (연기가) 급하다"며 웃었다. "신인의 자세로 돌아갔기 때문에 할일이 많죠. 점점 나이가 들면서 체력과 정신력이 떨어지면 무대는 설 수 없는 곳이에요. 앞으로 10년을 더 할 수 있다고 치면 1년에 연극을 할 수 있는 게 많아도 두 편이니 20편밖에 안 됩니다. 다른 생각을 하면 안 돼요. 평생 해왔던 일을 업으로 이루고 싶어요."
'홀스또메르'는 1997년 백상예술대상 연극부문 작품상과 연출상, 2000년 백상예술대상 연극부문 인기상을 받은 작품이다.
이번 무대에서는 뮤지컬배우 이경미가 홀스또메르의 첫사랑 암말 '바조쁘리하'와 서커스에서 맨발로 말 묘기를 보여주는 여인 '마띠에', 1인2역을 맡는다. 뮤지컬배우 김선경이 이경미와 같은 역을 연기한다. 홀스또메르의 참모습을 알아준 최초의 사람인 세르홉스끼는 서태화가 담당한다.
5인 밴드와 함께 하는 음악극이기도 하다. 연출 김관, 음악감독 조선아씨 등이 힘을 보탠다. 28일부터 3월30일까지 서울 영등포동 타임스퀘어 CGV신한카드아트홀에서 볼 수 있다. 박원묵·지대한·이광열·김기분 등이 출연한다. 5만5000~7만7000원. 극단 광대무변. 1588-06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