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전 대통령 일가가 미납추징금 자진납부 계획을 제출한 지 사흘 만에 장남 재국씨가 검찰에 다시 출석했다. 차남을 소환한 지 열흘 만에 장남이 소환되면서 추징금 환수와 함께 수사가 속도를 내고 있다.
서울중앙지검 전두환 일가 미납추징금 특별환수팀(팀장 김형준 부장검사)은 13일 비자금 세탁 및 탈세 의혹 등을 받고 있는 전재국(54)씨를 참고인 신분으로 불러 조사 중이다.
재국씨는 이날 오전 8시20께 비공개로 출석했으며 검찰 지휘부와 별도의 티타임은 갖지 않고 조사실로 직행해 변호인 입회 하에 조사를 받고 있다. 조사 도중 혐의점이 드러나면 피의자 신분으로 전환할 계획이다.
검찰은 이날 재국씨를 상대로 자진납부계획서를 검토하며 우선적으로 추징이 가능한 재산과 처분 절차 등을 논의하고 있다. 이어 비자금 은닉·세탁, 역외탈세 등 재국씨가 연루된 의혹 전반에 대해서도 확인할 계획이다.
재국씨는 전 전 대통령의 비자금으로 서울 한남동 유엔빌리지 일대 땅 578㎡를 매입해 친인척 명의로 차명 보유하고, 고가의 국내외 미술품을 사들여 비자금을 세탁한 의혹이 짙다.
검찰은 재국씨의 고종사촌 이재홍(57)씨가 전 전 대통령 일가를 대신해 한남동 땅을 매입하는 과정에서 비자금이 유입되고 땅을 판 매각대금이 재국씨에게 흘러들어간 정황을 잡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씨는 당시 장인 강모(78)씨와 재국씨의 회사 직원 김모(54)씨와 함께 땅을 사들여 2002년 김씨 지분을 인수한 뒤 이듬해 4~5월 재국씨의 지인인 외식업체 대표 박모(49)씨에게 51억3000만원에 매각했다.
당시 시세가 60억원을 상회한 점을 감안하면 다운계약서로 거래하면서 실제로 더 많은 매각대금이 재국씨에게 전달됐을 것으로 검찰은 의심하고 땅을 압류했다.
이와 관련, 이씨는 청우개발을 운영하면서 땅을 차명으로 관리해준 혐의로 지난달 13일 체포돼 이틀 후 석방됐으며, 검찰 조사에서 비자금이 매입자금으로 쓰인 사실을 시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또 재국씨한테서 압수한 미술품 거래장부를 토대로 구입자금 출처와 거래 과정 등을 캐묻고 있다.
재국씨는 검찰에 압수된 미술품 554점과 자진납부할 미술품 40점 등 총 100억원 상당의 미술품 600여점을 비자금으로 매입한 의심을 사고 있다. 작품 중에는 겸재(謙齋) 정선(鄭敾)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6인의 화가를 일컫는 3원3재'(三園三齋)에 속하는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의 작품도 포함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재국씨는 2004년 7월 아랍은행 싱가포르 지점에서 해외 페이퍼컴퍼니 명의로 개설한 금융계좌에 170만 달러를 예치해놓고 6년에 걸쳐 홍콩으로 전액 인출해 국외 재산 유출과 비자금 세탁 의혹도 있다.
검찰은 재국씨가 조세피난처에 세운 페이퍼컴퍼니 '블루 아도니스 코퍼레이션(Blue Adonis Corporation)'를 비자금을 은닉·세탁하기 위한 창구로 뒀을 가능성을 염두에 자금흐름을 분석해왔다.
특히 차남 재용씨를 조세포탈 혐의로 처벌한 시점인 2004년 페이퍼컴퍼니 명의로 계좌를 개설하고 자금을 운용하는 과정이 석연치 않다고 보고 자금의 이동 과정과 용처를 면밀하게 들여다봤다.
검찰은 이날 조사에서 재국씨가 소유한 출판업체 '시공사'와 야생화단지인 '허브빌리지', 재국씨의 아내 정도경씨와 사촌 이재홍씨가 각각 이사, 대표이사로 등재돼 있는 청우이앤디의 설립·운영 자금으로 비자금을 끌어 썼는지도 확인할 것으로 보인다.
검찰은 이날 밤 늦게까지 재국씨를 상대로 한남동 땅·미술품 매입자금의 출처, 페이퍼컴퍼니 명의로 계좌를 개설한 배경 등을 강도높게 추궁한 뒤 조사를 마치면 일단 귀가시킬 계획이다.
검찰은 재국씨에 대한 조사결과와 증거자료 등을 토대로 사실관계 확인을 거친 뒤 사법처리 여부를 결정할 방침이다.
법조계에서는 추징금 전액을 자진납부하고 검찰 조사에도 협조한다는 입장을 밝힌 만큼 검찰이 재국씨를 불구속 수사하는 쪽에 무게를 둘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검찰 관계자는“환수와 관련된 부분과 의혹 사항들을 조사하고 있지만 계속 참고인으로 갈지, 신분이 전환될지는 지켜봐야 한다”며 “나머지 자녀들도 모두 직접 조사한다는 원칙을 세운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앞서 재국씨는 지난 10일 가족을 대표해 미납추징금 1672억원에 관한 자진납부계획서와 이행각서를 검찰에 제출하고 2시간 정도 조사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