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이 국가정보원의 정치·선거 개입과 경찰의 수사 축소·은폐를 ‘범죄’로 보고 전직 수장인 원세훈(62) 전 국정원장과 김용판(55) 전 서울경찰청장을 공직선거법 위반 등 혐의로 불구속 기소하는 등 수사 착수 57일 만에 결과를 발표했다.
검찰은 장고 끝에 원 전 원장에게 정치개입뿐 아니라 선거개입 혐의에 대한 법적 책임을 지웠지만, 이 같은 결론을 내기까지 물증 확보 못지않게 법리적인 해석도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다.
◆원세훈, 정치개입 혐의는?
검찰은 원 전 원장에게 국정원법 제9조(정치 관여 금지)를 적용했다.
이 조항은 국정원 원장·차장과 직원이 정당이나 정치단체에 가입하거나 정치활동에 관여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위반할 경우 5년 이하의 징역과 5년 이하의 자격정지에 처한다.
검찰은 원 전 원장이 내부 간부 회의와 ‘원장님 지시·강조 말씀’ 문건 등을 통해 4대강 사업, 한미 FTA, 세종시, 제주해군기지 등 정부의 주요 정부 정책과 업적에 대한 홍보를 지시한 것이 국정원 직원들의 정치 개입으로 이어진 것으로 봤다.
실제로 원 전 원장은 세종시 등 국정 현안을 지칭하며 “반대를 위한 반대를 일삼는 좌파단체들이 많은데 보다 정공법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주문했고, 4대강 사업·제주 해군기지 건설 등 국책사업과 관련해 “좌파세력 등이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진보성향 교육감이 추진한 무상급식은 “포퓰리즘적 허구성”이라고 매도했고, “종북세력 척결과 국정성과 홍보가 별개의 사안이 아니라 연결되는 문제. 국정성과를 제대로 알리는 것이 종북좌파에게 이기는 길”이라고 강조한 사실이 드러났다.
특히 이명박 전 대통령의 외교 실적, 경제성과 등을 널리 홍보할 것을 반복적으로 지시한 점도 고려했다.
검찰 관계자는 “이 같은 지시는 결국 대통령이나 여당에 대한 찬양·지지 의견을 유포하거나 정부 시책에 반대하는 입장을 보이는 야당이나 야권 성향 정치인에 대한 비방·반대 의견을 유포하는 정치관여 행위에 대한 지시로 귀결된다”고 설명했다.
◆원세훈 선거개입 혐의는?
검찰 내부에서 가장 논란이 된 쟁점은 공직선거법이었다.
검찰은 고심 끝에 원 전 원장에 대한 공소장에 공직선거법 제85조(지위를 이용한 선거운동금지) 1항 위반죄를 적용했다.
공무원은 지위를 이용해 선거운동을 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는 선거법 85조 1항을 어길 경우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600만원 이하의 벌금으로 처벌한다.
검찰은 ‘원장님 지시·강조 말씀’에서 종북 세력에 대한 선제적 대처 등을 지시한 것이 국정원 직원들의 문재인·이정희 후보 비방 글을 올린 정황과 무관치 않은 것으로 봤지만, 원 전 원장이 명시적으로 특정 후보에 관한 댓글 작업을 지시한 직접적인 증거는 확보하지 못해 선거법에 대해선 법리검토를 거듭했다.
그럼에도 심리전단을 동원해 여당을 옹호하고 야당을 비방하는 내용의 댓글과 관련 게시글에 추천·반대 의사를 표시토록 주문한 것은 궁극적으로 선거운동을 지원한 것과 다름없어 법에 저촉된다는 게 검찰의 판단이다. 원 전 원장이 애초부터 선거 판세에 영향을 미칠 목적이나 의도가 짙게 깔려있었다고 본 것이다.
실제로 심리전단은 민주당과 문재인 후보를 겨냥해 'NLL로 수세에 몰리자 실패로 끝난 햇볕정책 계승하자고 선동질', '좌빨들이 외쳐대는10년 동안의 대북 퍼주기로 과연 남은게 뭔가' 등으로 비판했다.
이정희 후보에 대해선 '통합진보당이 북한 노동당의 2중대라는 비판을 자초하고 있다', '어떻게 종북좌파가 버젓이 대한민국을 대표하겠다고 나댈 수 있지?' 등의 글을 올렸다.
검찰 관계자는 “원 전 원장은 선거 시기에 종북세력에 대한 공격을 강화함으로써 이들 세력이 제도권에 진입하려는 것을 적극적으로 저지하도록 지시했다”며 “종북세력으로 규정한 일부 야당과 야권 후보자에게 불리한 여론을 조성하는 행위를 주문한 것은 선거법상 금지한 공무원의 지위를 이용한 선거운동으로 귀결됐다”고 했다.
◆김용판 선거개입 혐의는?
검찰은 김용판 전 서울청장에 대해서는 형법상 직권남용, 경찰공무원법 위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를 적용했다.
김 전 청장이 이른바 '국정원 여직원의 댓글' 사건의 수사를 축소·은폐토록 수사팀에 부당한 압력을 넣고, 대선을 3일 앞둔 심야에 급작스레 중간수사결과 발표를 지시한 것은 선거 판세에도 영향을 줬다고 본 것이다.
검찰이 이런 결론을 내린 데에는 김 전 청장이 국정원 여직원 김모(29·여)씨의 컴퓨터 분석 과정에서 수서경찰서 수사팀이 의뢰한 '대선토론', '단일화', '종북' 등 키워드 100개를 '박근혜', '새누리당', '문재인', '민주통합당' 등 4개로 축소토록 지시한 사실도 무관치 않다.
검찰 관계자는 “국정원이 사용한 40개의 ID·닉네임은 게시글 파악의 단서임에도 게시글, 댓글과는 별개라는 이유로 누락했다”며 “박근혜·문재인 후보 관련 게시글 등은 게재인지, 열람인지가 명확하지 않다는 이유로, 이정희 후보 관련된 게시글은 분석범위에서 벗어난다는 이유 등을 들어 결국 누락시켰다”고 설명했다.
‘국정원 직원의 정치관련 댓글 혐의를 찾을 수 없다’는 수사결과를 내놓은 것도 결과적으로는 박근혜 후보에게 유리하게 작용했을 것이라는 점도 고려했다.
실제로 김 전 청장의 지시로 서울경찰청은 분석결과 발표 전 선거개입 의혹을 해소해줄 목적으로 12월15일 늦은 오후부터 미리 보도자료 초안을 작성하는 등 보도자료 배포 및 브리핑을 준비했다.
정치관련 댓글 등이 많이 발견됐음에도 '게시글이나 댓글을 발견하지 못하였음'이라는 초안 문구가 허위라는 점이 너무 명백하자, 이를 감추기 위해 '게시글이나 댓글을 게재한 사실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로 표현을 수정하기까지 했다.
특히 수서경찰서로부터 증거분석결과물 회신을 거부함으로써 정상적인 수사진행을 방해한 점도 선거 개입 의도가 깔려있는 것으로 검찰은 판단했다.
검찰 관계자는 “서울경찰청은 수서서 수사팀에 디지털증거분석 상황과 결과를 알려주지 말라는 지침을 정해 (수사자료)전달을 차단시켰다”며 “당시 수사 의지가 높았던 수사팀에서 디지털증거분석 결과를 갖고 수사를 진척시키면 국정원 개입 의혹이 더욱 가중되거나 실체가 일부 드러날 가능성이 있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