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관사정(蓋棺事定)이란 말이 있습니다. 관의 뚜껑을 덮기 전에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뜻인데요. 본지는 이 지면을 통해 사후 재평가 되는 명사들의 참 모습을 담아보고저 합니다.
<군불견간소혜>란 시에서 두보는
그대는 보지 못하였는가 길에 버려진 못을
그대는 보지 못하였는가 부러져 넘어진 오동나무를
백년 뒤 죽은 나무가 거문고로 쓰이게 되고
한 섬의 오래된 물은 교룡이 숨기도 한다
장부는 관 뚜껑을 덮어야 모든 일이 결정된다
그대는 아직 늙지 않았거늘
어찌 원망하리 초췌해 있음을… 이라고 위로한 바 있습니다.
폭과 깊이를 갖춘 천재 학자
원광대 명예교수인 임학자 류택규 씨는 임경빈에 대해 “임학계에선 다시 그런 분이 나오기 어려울 만큼 거목입니다. 시, 서예, 그림에 재주가 뛰어나고 영어, 일본어, 한문에 능통했습니다. 다방면에 걸쳐 연구하고 글을 쓰면서도 하나 파고들면 끝까지 해결을 볼 정도의 깊이가 있었어요. 한 번 들으면 절대 잊어버리지 않을 정도로 머리가 좋았습니다”라고 말했다.
임학분야의 전공자라면 누구나 임경빈의 독보적인 위치에 대해 이의를 달 사람은 없다. 임업에 관한 59권의 저서와 나무와 숲에 대한 수필 407편, 국내외 학술논문 154편, 논설 104편 등은 임경빈의 업적을 그대로 설명해주는 증거이다.
임경빈의 삶은 크게 두 시기로 구분된다. 전기에는 서울대 교수(1955-1982)로 재직하면서 세계적인 연구를 통해 임학에 큰 기여를 한 것과 녹화사업의 주역으로 나무심기에 남다른 공이 있었다는 것이다. 후기에는 나무나 숲, 자연에 관한 문화적인 글쓰기를 통해 산림문학이라는 분야를 처음으로 개척했다.
경북 예천 출생인 임경빈은 수원농전 임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농대 교수로 재직하며 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 초까지 육종학자인 스승 현신규(1911-1986) 박사를 도와 소나무 삽목(꺾꽂이)시험을 실시했다. 이 연구를 통해 세계 최초로 소나무에 식물호르몬인 ‘옥신’이 들어있음을 밝혀냈고 뿌리가 내리는 원리도 규명했다.
그 이후 임경빈은 독자적으로 방사선을 이용한 나무의 수종개발 연구에 착수해 새로운 품종을 개발하는데 몰두한다. 세계적으로 방사선을 이용해 원예가 아닌 나무에서 새 품종을 개발한 경우가 없었다. 그도 실패했으나 우리나라 최초로 그런 시도를 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1971년에는 스톡홀름에서 1년간 소나무의 일장효과 실험을 하기도 했다. 원예는 밤과 낮의 길이를 다르게 하면 꽃을 피우기도 하고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기도 하는데 이것이 과연 나무에도 적용되는지를 연구한 것이다. 연구결과는 나무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 후 임경빈은 수원의 서울농대에서 소나무 산지(産地)시험을 실시했다. 전국의 소나무를 채취해 수원에 심은 뒤 제일 잘 자라는 것을 찾아내는 방식이었다. 보통 10년에서 20년 이상 걸리는 이 시험은 그가 서울대를 떠나면서 중단되었다. 그러나 그가 뒤에 소나무에 관해 많은 글을 발표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연구 덕택이었다.
돌연 서울대 떠나
임경빈은 신군부의 서슬이 퍼렇던 82년, 타에 의해 돌연 서울대를 떠났다. 서울대 사퇴는 임경빈 개인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고 이후 학문 연구보다는 나무와 숲의 역사 및 문화, 생태를 다룬 문화적인 글쓰기에 몰두하는 계기가 되었다. 임경빈은 왜 서울대를 떠났는가. 임경빈은 끝내 함구했으나 가끔 교수들이 자신을 몰아냈다는 암시를 하기도 했다. 동료나 제자들 역시 누군가 자신의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 불리한 세력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그를 희생양으로 삼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부에서는 경찰이 학교에 상주하고 있어 교수들도 늘 대기하고 있어야 했던 그 시절, 대외활동에 바빴던 그가 자리를 자주 뜬 것이 낙인찍힌 계기가 아니었을까 추측하기도 한다. 서울대 농생대 이경준 교수는 “우리는 그 분이 학교를 떠난 것을 불명예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평소 정치적인 발언을 한 분도 아니었고 그리고 인간적으로도 존경할 만한 분이었는데 그렇게 된 것은 그 분의 잘못이 아닙니다. 서울대도 2000년 명예교수로 위촉해 그 분의 명예를 회복시켰습니다”라고 말했다.
임경빈은 그 후 국립산림과학원에 근무하다 1986년 원광대로 자리를 옮겼다. 원광대에서는 정년을 70세까지 보장하며 그의 학문을 높이 샀다.
『임학사전』에서 『나무백과』까지
임경빈은 60년대부터 임학분야에서 중요한 서적을 집중 집필, 번역했다. 대표 저서인 『임학개론』(일조각)은 1960년에 출간된 임업의 기초 저서로 『조림학원리』와 『조림학본론』과 함께 그의 대표적인 학문서이다. 묘목을 키우고, 산에 나무를 심어 가꾸는 것을 대상으로 하는 조림(造林)은 그의 전공이었다. 1960~1970년대 그는 임업직 공무원들의 조림기술 교육을 담당해 우리나라 조림정책의 방향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는 조림학에서 유명한 저서인 『조림기술』(베이커 지음)과 세계적인 책으로 지금도 쇄를 거듭하고 있는『유용식물번식학』(할트만,케스터 지음)을 이미 60년대에 번역했다.
그는 또 1966년 우리나라 최초로『임업사전』(농림신문사)은 펴냈다. 류택규 교수는 “『임업사전』은 영어와 독어, 한자가 병기돼 있어 많은 참고가 되기 때문에 절판된 지금도 전공자들이 사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반인을 위한 저서로 손꼽히는 것의 하나는 1977년부터 2002년까지 전 6권으로 출간된『나무백과』(일지사). 문집, 역사서 등 옛 문헌에 나타난 자료를 바탕으로 우리 역사와 전통, 풍습을 소개하여 기존 나무관련 서적과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책에 대한 대단한 욕심
임경빈은 제자를 키우는 일보다 자신의 학문적 성취욕이 많은 형이었다. 한 동료교수는 “자상하고 다정다감하고 학생들이 매료될 만큼 강의를 잘하는 분이었다”며 “학문적 욕심만 덜했더라면 지금보다 후진들에게 더 추앙을 받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특히 책에 욕심이 많았다. 제자들은 그가 책을 빌려 가면 돌려주지 않아 곤혹스러워 했다.
임경빈과 『조선임학사』(1,2권)에 얽힌 이야기는 그의 성격의 일면을 엿보게 한다.『조선임학사』는 1941년 일본인들이 만든 책으로 출간되던 날 창고에 불이 나 모두 타버렸다. 그 와중에 남은 것은 단 한 질. 당시 임업시험장에 근무했던 김영준(1967년 농림부장관 역임) 씨가 밤에 본다며 가져간 것이었다. 김영준 씨는 1970년 그 책을 임경빈에게 인계했는데 임경빈은 그 후 그 책을 공개하지 않고 혼자서 자신의 저술에 맘껏 활용했다. 사방에서 아우성을 쳐도 묵묵부답이던 그는 2000년 12월 마침내 세상에 넘겨줬다. 자신에게는 더 이상 효용가치가 없었다.
그 독점욕의 대가가 그의 수많은 저술이었던 것이다.
김예옥/출판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