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의 달’ 6월을 보내면서 만감이 교차한다. 6·25 전쟁의 아픈 상처도 반 백 년이 넘어 가면서 많이 치유되고 있는 것 같다. 해마다 3·1절과 8·15 광복절을 보내면서 상처들을 되살펴 보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기억들이 점점 사라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단지 꼭 잊지 않아야 할 것은 6·25 전쟁의 고통 속에 살고 있는 전사자와 부상자, 그 유가족들이다. 죽은 사람들은 가슴에 피맺히고 쓰라린 기억을 잊을 수가 있다. 그러나 살아남아 고통을 받아온 부상자들은 어떠한 것이며, 졸지에 가장이나 형제들을 잃고 척박한 세상에 내버려진 유가족들 처지는 어떠했을까. 천혜의 고아로 남겨진 아이들은 지금 어디에 있으며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그들에게 제대로 보훈이나 보상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일까.
최근 공무원 시험에서 국가 유공자들에 대한 우대를 놓고 특혜시비가 일고 있다. 국가 유공자들의 자녀에게 약간의 가산점을 주다보니 공무원 시험의 절반 이상에 이르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경제난에 취직의 어려움이 겹쳐있는 상태여서 이해가 간다.
국난의 위기에서 몸을 바쳐 싸운 국가유공자에 대한 보답을 생각하면 약간의 우대조치나 가산점 제공은 큰 보훈이 아니다. 그러나 취업전쟁 속에 단 1점이 새로운 실정에서는 약간의 우대가 엄청난 특혜로 보이는 것이다. 정상적 수험생들에게는 억울한 불이익이 된다.
돌이켜 살펴보면 국가유공자는 6·25 전상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필자도 3·1 운동때 순국하신 배영직(裵榮直) 선생의 직계 증손이다. 지금은 국립묘지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잠들고 있는 증조부 배영직 선생은 34세의 혈기왕성한 나이에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1919년4월1일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는 유관순 열사가 시위봉기에 앞장서고 있었을 때 배영직 선생은 바로 지금의 계룡대 앞 두계장터에서 1,000여명을 운집 시켜놓고 독립시위를 주도했다. 그리고 왜경에게 끌려가 1926년 끝내 군산감옥에서 옥사를 하셨다.
당시 증조부 배영직 선생이 왜경에 끌려가자마자 일제는 계룡시 입암리 소재 가택을 급습했고 불로 태워버렸다. 증조모는 자녀들과 산속으로 피신했고 이틀만에 대둔산을 넘어 간신히 논산의 큰집으로 도피할 수가 있었다.
조부는 만주로 도피했고 작은 조부는 인천으로 피신해 결국 객사를 하셨다. 제대로 일자리를 구할 수가 없었고 학업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올해 78세인 아버지가 간신히 면서기로 취직해 부여 부군수에 이르기까지 집안을 이끄셨다. 학력은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였다.
당장 끼니를 때워야 했고 눈물 훔치기에 급급했다. 집이 불탔기에 남의 집 허청이나 부뚜막에서 새우잠을 자야했다. 순국하신 증조부는 모진 고문을 받아 몸에 고자리가 들끓었고 거적때기를 뒤덮여 참혹하게 돌아가셨다.
당시 이야기를 전해 들으면 가슴이 뭉클해진다. 일제에 대한 배일감정은 뼈 속까지 사무친다. 이런 참상을 겪은 우리 유족들은 지금 조국에게 모든 것을 보상해 달라고 할 것인가? 사소한 특혜를 달라는 것이 아니다. 몇 푼의 돈으로 보상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분명한 명예회복이다. 필자와 같이 유족들 대부분의 뜻은 같을 것이다. 우선 고인의 희생에 걸 맞는 명분과 명예를 찾아 줘야한다. 그리고 후손들이 지난날의 영예를 되찾을 수 있도록 교육의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 바로 국가유공자의 진정한 보상은 장학이다.
올해는 을사보호조약을 맺은지 100년이 되는 해다. 을사보호조약은 한일합방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남북분단 비극의 씨앗이 되었다. 그 위난속에 국가유공자들이 탄생했다. 지금 유족들은 몇점 가산점수로 눈총 받기를 원치 않는다. 진정한 장학으로 역사적 재탄생이 절실하다.
고대경영학과·대학원경영학과 졸업 I 연세대대학원 경영학 박사과정 I 한국공공정책연구원장 I 시사뉴스주필(현) I
저서: 시사칼럼집 ‘21세기, 우리민족의 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