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리적 파손 넘어 물건의 효용, 피해자의 감정 등도 판단 기준
최근 '재물손괴죄' 인정 판례 잇따라
[시사뉴스 김성훈 기자] 최근 들어 주목할만한 재물손괴죄 판례들이 잇따라 나오고 있다. 흔히 '재물손괴'라고 하면 '물건 파손'을 떠올리기 쉽지만 이보다 넓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31일 법원에 따르면 대법원 3부(주심 노태악 대법관)는 지난 24일 재물손괴 등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A씨의 상고심에서 벌금 50만원을 선고한 2심 판결을 확정했다.
A씨는 지난 2018년 7월 서울 노원구의 한 시멘트공장 인근 공터에서 평소 자신이 굴삭기를 주차해놓던 장소에 B씨가 승용차를 주차해둔 것을 보고 B씨의 차량 앞·뒤에 철근과 콘크리트 구조물 등을 설치해 차량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한 혐의로 기소됐다.
무죄를 선고한 1심과 달리 2심은 "재물의 효용을 해한다고 함은 사실상으로나 감정상으로 그 재물을 본래의 사용 목적에 제공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드는 것을 말한다"며 "일시적으로 그 재물을 이용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드는 것도 포함한다"고 했다. 이어 "A씨의 행위로 B씨가 약 18시간 동안 승용차를 본래의 용도인 운행에 이용할 수 없었던 사실이 인정된다"고 덧붙였다.
재판부가 언급했듯 재물손괴죄는 단지 물리적이거나 영구적인 파손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형법 제 366조는 재물손괴죄를 "타인의 재물, 문서 또는 전자기록 등 특수매체기록을 손괴 또는 은닉 기타 방법으로 그 효용을 해한 경우에 성립한다"고 규정한다. 쉽게 말해 물건을 훔치려는 영득의 의사를 필요로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재물이 갖는 효용 가치를 멸소·감소시키는 범죄인 셈이다.
전문가들은 재판부가 '기타 방법으로 효용을 해한 경우'라는 문구를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따라서 범죄 인정 범위가 넓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이창현 한국외대 로스쿨 교수는 "사실상 물건을 본래 목적에 맞게 쓸 수 없게 만드는 것이 손괴"라며 "대법원 판례만 보더라도 차는 운전하기 위해서 존재하는데 직접적으로 훼손하진 않았더라도 이런 목적에서 벗어나 차를 꼼짝 못하게 만드는 것은 사물의 효용을 해한 재물손괴죄"라고 했다.
지난 2016년 5월 부산지방법원 동부지원은 잔금을 받지 못했다며 문을 수동으로만 열리도록 한 자동문 업자에게 재물손괴죄를 적용해 벌금 200만원을 선고했다. 당시 재판부는 업자가 자동문을 쓸모없게 만든 것과 마찬가지라며 효용을 해한다는 명목으로 재물손괴죄를 인정했다.
'효용'이란 개념이 사람의 수치심, 모멸감 등을 기준으로 판단이 내려지는 경우도 있다. 체액을 이용해 물건의 기능을 해치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서울북부지법 형사5단독 홍순욱 부장판사는 지난 5일 여자 후배의 사무실 책상 위에 있던 텀블러를 화장실로 가져가 그 안에 체액을 남긴 혐의를 받는 C(48)씨에게 벌금 500만원을 선고했다. 홍 판사는 C씨 행위가 텀블러의 효용을 해쳤다고 판단해 재물손괴 혐의를 인정했다.
이에 이 교수는 "수치심, 모멸감 때문에 사용하지 못하게 됨으로써 본래 그 물건의 기능을 살리지 못한 사례이므로 효용을 해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체액을 이용해 물건의 효용을 해칠 때 한 사람이 소유하고 있는 물건만 손괴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함께 먹는 음식 등도 손괴 가능한 재물의 대상으로 여겨진다.
서울서부지법 형사항소1-3부(부장판사 정계선)는 아내 음식물에 침을 뱉어 재물을 손괴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변호사 D(47)씨의 항소심에서 1심과 같은 벌금 50만원을 지난 24일 선고했다. D씨는 지난해 4월28일 오전 11시30분께 서울 은평구의 주거지에서 부인이 전화를 하면서 밥을 먹는다는 이유로 부인 앞에 놓인 반찬과 찌개에 침을 뱉은 혐의를 받는다.
재판부는 "타인의 재물을 손괴한다는 것은 타인과 공동으로 소유하는 재물을 손괴하는 경우도 포함한다"며 "이 사건 반찬과 찌개 등을 D씨가 단독으로 소유하고 있지 않았다는 점은 분명하다"고 판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