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 오병욱 칼럼니스트] 오늘은 북한산 족두리봉이 나를 부른다.
금주의 카톡 통신에 “홍제역 1번 출구 집합, 탕춘대를 거쳐 족두리봉 산행”이 떴다. 지난 주말은 구룡산이었으나 개인적인 일정으로 불참, 금주산행을 기대했는데 아침부터 눈이 날리더니 오후 들어 날씨가 화창하다. 오늘 1번 출구의 집합 인원은 4명. 언제 보아도 반가운 얼굴들과 인사를 하고 북한산 자락길로 서둘러 떠난다.
오늘은 자락길 대신 능선의 산길을 따라 숲길을 걷는다. 날은 화창하지만 아직은 겨울이라 앙상한 나뭇가지들을 보며, 봄날의 개나리를 생각한다. 이곳은 삼월 말 사월 초의 봄소식을 개나리가 화려하게 만개하여 알려주는 명소다.
휴일이라서인지 아주머니 그룹과 가족, 친구 등 트레킹에 나선 사람들로 제법 붐빈다. 내가 젊었을 때는 그다지 산에 간 기억이 없는데 요즘은 등산 인구가 많아서인지 북한산은 언제나 사람들로 활발하다. 능선을 따라 중간의 장군바위 전망대에 오른다.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앞의 인왕산과 좌측의 북악산, 우측의 안산 북쪽 면이 한눈에 들어온다.
며칠 전 내린 눈인지 오늘 아침에 쌓인 눈인지 북측 면은 잔설을 가지고 제법 겨울 산의 풍취도 그리고 있다. 다시 산을 돌아 탕춘대 암문으로 향하다 정자에서 가져간 커피와 음료로 한숨을 돌린다. 우리와 떨어져 앉은 옆자리 아주머니들이 암행어사 드라마 이야기를 하는 듯하다. 내 어렸을 때 어사 박문수라는 드라마가 재미있었는데 요즘 이야기는 어떤지 모르겠다. 역사책을 읽다 보니, 어사라는 직업도 참 어려운 줄 알겠던데.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풍운아 정약용과 김정희도 젊어서 암행어사를 했다. 정약용은 32살 때 정조의 명으로 암행어사를 나가 경기도 관찰사 서용보가 농민을 수탈하는 등 횡포가 심하다는 비리를 파헤쳐 파직하게 하였으나, 이 일은 후에 정약용의 발목이 잡히는 큰 계기가 됐다.
서용보는 파직되었음에도 정조 사망 후, 노론 벽파의 거물로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에 화려하게 부활하여 44세의 젊은 나이로 우의정의 반열에 오른다. 그 후, 서용보는 정약용이 귀양살이에서 해배(解配)되는데 반대하고 끝까지 박해한다.
구한말 윤치호의 일기에 의하면 “다산 정약용이야말로 이조가 배출한, 아니 박해한 위대한 학자다. 그는 천주교로 개종했다는 의심을 받았다. 그의 정적들은 그를 비참하게 만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이 학자의 진가를 알고 있었던 정조(正祖)가 그를 어여삐 보지 않았더라면, 그는 아마 처형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는 16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면서 매우 광범위한 주제를 다룬 70여 권의 귀중한 원고를 남겼다. 그런데 요즘에도 노론 계에 속하는 인사들은 그가 남인이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의 책을 읽지도, 사지도 않는다.”라 적었다 한다.
이이화 선생의 ‘동학 농민 혁명사’에 의하면, 그 당시의 시대상은 지방 수령들의 토악질이 얼마나 심했는지 ‘안동 김씨가 성긴 얼레빗이라면 여흥 민씨는 촘촘한 참빗이어서 서케까지 샅샅이 훑어 먹었다고 조롱할 만하다’ 하며. 강진에 귀양 간 정약용이 저술한 ‘목민심서’를 집권층인 노론은 철저히 외면하였지만, 전라도의 몰락한 양반과 양민들이 이를 읽고 고부 군수 조병갑의 토악질에 대항하는 동학혁명의 정신이 되었다고 하지 않던가.
김정희는 어떤가. 김정희는 34세가 되던 1819년(순조 19년)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7년 뒤인 1826년에 충청우도 암행어사로 임명되어 서산, 당진, 보령 등지를 암행하면서 10여 명의 탐관오리를 적발하였다. 그중에 비인 현감으로 있던 김우명이란 자가 김정희에 의해 봉고파직 되었다. 그런데 어사 김정희에 의해 파직되었던 김우명은 안동 김씨의 세를 뒤에 업고 4년 후에 다시 중앙에 관리로 등용되었다.
그리고 김우명은 김정희와 아버지 김노경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려 김정희는 사직, 김노경을 3년 귀양가게 만든다. 그 후, 다시 김우명이 대사간으로 보임을 받은 1년 후인 1840년(헌종 6), 김우명은 다시 10년 전의 윤상도(尹尙度)의 옥사를 거론하여 또다시 이미 사망한 김노경과 병조참판으로 있던 김정희를 탄핵하여 김정희가 제주도로 귀양가게 만든다. 귀양 덕에 추사체가 완성되었다니 그나마 다행인가.
어릴 적에는 멋진 이몽룡의 암행어사 행차가 삶에서는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되는 것이 인생인가 보다.
휴식 후 탕춘대 암문을 지나고 탕춘대 탐방센터를 지나 본격적으로 성곽길을 따라가다 오른쪽으로 비키면 북한산 차마고도 길이다. 암석을 깎아 길을 낸 수고도 고맙지만, 차마고도 길에서 보는 경치 또한 절경이다. 언제와도 감탄하는 차마고도 길. 복작거리는 시내에서 1시간여 만에 별천지를 만날 수 있는 북한산의 명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산세 풍경이다. 이곳에서 바라보면 한없이 머무르고 싶어지는 곳. 북한산이 주는 휴식처. 수식할 수 없는 즐거움이 온몸을 감싼다.
다시 불광동 쪽으로 길을 잡아 족두리봉 앞에 서면 웅장한 자태가 드러난다. 동쪽으로는 오를 수 없어 아래로 돌아 서쪽으로 올라야 하는 북쪽벽은 아직 눈길이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아이젠은 가지고 갔지만, 아이젠 없이도 그런대로 지날 만하며 겨울 산행의 정취도 느낄 수 있어 좋다. 역시 겨울은 눈 덮인 설산이 제격이다. 드디어 서쪽으로 나와 정상에 올랐다.
정상은 탁 트여 시원하고 저 멀리 한강이 반짝이며 흘러간다. 그곳에 있는 족두리봉이 생긴 암벽의 역사, 주라기 시대 화강암의 지질특성에 대한 안내판도 ‘판게아’ 이론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 한반도도 3개의 다른 대륙에서 떨어져 나온 땅이 하나로 뭉쳐져 생긴 중생대 이후의 대륙이라는 사실을 내가 학교에 다닐 때는 배우지도 못했다.
정상에 서면 마음이 편해지며 자연의 경이로움이 느껴진다. 그 경이로운 세상에 암행어사의 정의로운 삶을 살려 했던 사람들이 고초를 당하기도 하고, 그 고초 덕(?)에 불후의 업적을 쌓기도 하는 게 인생인가 보다.
‘판구조론’에 대한 주장도 알프레드 베게너가 주장할 당시에는 정설이 아니었으나 어느덧 오늘날에는 정설로 되어있다. 보통의 과학’이란 책 낸 저자에 의하면 “과학 이론은 끊임없이 공격받고, 그 과정에서 굳건히 방어에 성공한 이론은 정설로 평가받으며, 그렇지 못하면 새로운 이론이 나타나 왕좌를 차지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과학 이론은 반박할 수 있어야만 제대로 된 이론입니다. 반박이 불가능한 것은 신의 뜻이거나 종교적 교리인 것이죠.”라며 과학적 사고로 사회학 하기를 강조했다.
겨울 산의 청량함을 맞보고 내려오는 하산 길의 화제는 독일 철학자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의 “인간이 자신의 형상을 따라 신을 창조했다.”는 주장과 “신이 자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창조했다,”는 종교의 교리에 관한 창조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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