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 김승리 기자] 정치권 일각에서 경제 활성화를 위해 기업인의 가석방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자, 재계는 여론 동향과 정치권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앞서 지난 2월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 받은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사회봉사 기간'을 마치자마자 활기차고 공격적인 경영 행보를 보여준 점도 '기업인 가석방 필요론'에 힘을 보태고 있다.
재계는 기업의 미래 먹거리 선점과 대규모 투자 등을 위해 '오너 리더십'이 필요한 만큼, 수감 중인 대기업 오너의 가석방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땅콩 회항 사건으로 불거진 '반재벌 정서' 등을 감안, 말을 아끼고 있다.
26일 재계에 따르면 현재 구속 수감 중인 기업인 가운데 가석방 요건을 충족시킨 기업인은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최재원 SK그룹 부회장, 구본상 전 LIG넥스원 부회장 등이다.
형법 제72조 가석방의 요건을 보면, "징역 또는 금고의 집행 중에 있는 자가 그 행상이 양호해 개전의 정이 현저한 때에는 무기에 있어서는 20년, 유기에 있어서는 형기의 3분의 1을 경과한 후 행정처분으로 가석방을 할 수 있다"고 명시돼 있다.
최태원 회장의 수감 기간은 이날 기준 695일로, 역대 재벌 총수 중 최장 기간이다. 계열사 자금 465억원을 횡령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최 회장은 지난해 1월 1심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됐다. 형기는 2017년 1월 말까지다.
최태원 회장과 함께 기소된 최재원 부회장도 형기의 3분의 1일을 채운 상태다. 최 부회장은 지난해 9월 2심에서 징역 3년6개월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됐다.
2012년 기업어음(CP) 사기 발행 혐의로 구속된 구본상 전 LIG넥스원 부회장도 지난 7월 대법원에서 징역 4년을 확정 받고 788일 동안 수감생활을 했다. 함께 재판을 받은 구본엽 전 LIG건설 부사장은 징역 3년 확정 후 319일 동안 수감생활을 해 조만간 가석방 요건이 충족된다.
반면 이호진 전 태광그룹 회장과 이선애 전 태광그룹 상무는 질병을 이유로 각각 보석과 형집행정지를 받아 실제 수감 기간이 가석방 요건에 미치지 못한다.
재계는 글로벌 경기침체와 기존 주력산업의 쇠퇴가 맞물려 기업의 입지가 급격히 위축되고 있는 만큼 대기업 오너의 가석방을 통해 미래 먹거리에 대한 대규모 투자가 단행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실제로 SK그룹은 대기업 오너의 구속 수감으로 인해 신성장 사업에 대한 투자를 뚝심 있게 지속하지 못하고 있다. SK그룹은 올해 태양광전지 사업에서 철수한데 이어 차세대 연료전지 사업에서도 손을 뗐다. 태양광전지와 연료전지 사업이 수익을 내는 등 본 궤도에 오르려면 대규모 투자가 이뤄져야 하는데, 이를 감내하기 힘들다고 판단한 것으로 풀이된다.
SK그룹 관계자는 "신성장 사업을 육성하기 위해서는 단기적으로 수익이 조금 나지 않더라도 이를 감내하고, 대규모 투자를 단행해야 그 결실을 볼 수 있다"며 "하지만 '오너 리더십' 부재로 이 같은 컨트롤 타워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최근 경영활동을 재개한 김승연 회장은 지난 7일부터 9일까지 한화건설이 시공 중인 비스마야 신도시 현장을 방문, 이라크 국가투자위원회(NIC) 사미 알 아라지(Dr. Sami R. Al-Araji) 의장을 만나 추가 사업에 대해 논의하는 등 오너 리더십의 필요성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김승연 회장은 귀국하는 길에 "이라크 건설 현장에서 빈손으로 오진 않았다. 이달 말이나 내년 1월쯤 추가 공사 수주가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김 회장은 또 삼성그룹 방산·석유화학 계열사를 1조9000억원에 인수하는 '빅딜'을 사실상 주도하면서 그룹의 주력사업을 강화하고 있다.
이 같은 '오너 리더십'의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재계는 정치권의 움직임과 여론 동향을 예의주시하며 신중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땅콩 회항 사건으로 반재벌 정서가 팽배한 상황에서 잘못 처신할 경우 여론의 역풍을 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재계 관계자는 "정치권 일각에서 기업인 가석방 논의가 나오고 있는 것은 맞지만, 실제 가석방으로 이어질지는 미지수"라며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고 사회적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까지 조금 더 기다려봐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