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 김한나 기자] '조로'에서 조로를 질투하는 악역 '라몬', '아이다'에서 야심에 불타는 '조세르', '노트르담 드 파리'에서 집시 우두머리 '클로팽', '레 미제라블'에서 '장발장'을 끝까지 쫓는 악랄한 경감 '자베르'….
뮤지컬배우 문종원(35)은 무대 위에서 항상 강렬했다. 끝까지 에너지를 소진하는 캐릭터를 도맡았다. 선이 굵은 외모, 정확한 발음의 강렬한 음성 등도 한몫했다.
뮤지컬 '블러드 브라더스'의 내레이터 역은 문종원에 대한 이런 편견을 깨트리고 있다.
가난한 집에 남은 '미키'(송창의·조정석), 부잣집에 보내진 '에디'(장승조·오종혁)
남편이 집을 나간 후 홀로 가족의 생계를 꾸리는 '존스턴 부인'(진아라·구원영)의 선택으로 운명이 갈리는 이란성 쌍둥이의 이야기가 중심이다.
그러나 에디와 미키 못지 않게 극의 중심축을 이루는 인물은 존스턴 부인과 내레이터다. 극의 전개에 긴장감을 불어넣는 중요한 배역이다.
특히 문종원이 맡은 내레이터는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인물들의 다양한 감정선을 대변한다. 강렬하고 뜨거운 모습 뿐 아니라 다양한 감정의 결을 보여줄 수 있다.
"초반에는 그냥 악마, 천사, 아이 해당 캐릭터에서 풍기는 느낌대로 연기했어요. 그런데 계속 연기를 하다 보니 인물들의 감정 자체를 느끼게 되더라고요. 연출님이 처음에 더블 캐스팅 이야기를 하셨는데 원캐스트를 하고 싶다고 고집했죠. 극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역이라 공연의 막이 오를 때부터 종연 시점까지 한명이 일관된 선을 지켜나가는 것이 맞다고 판단했거든요."
무엇보다 '첫 번째 관객' 같은 느낌이 들어 마음에 드는 캐릭터다. "공연 도중 밴드 석에 앉아서 지켜보기도 하고. 등장인물들을 다양하게 바라볼 수 있는 여러가지 특권이 있거든요. '무대 위 유일한 관객' 같은 느낌이 들어요."
자신을 비우는 연기를 깨닫게 됐다. "그간 제게 맞는 역을 해왔다고 연기했는데 견디기 힘든 면도 있었어요. 최근에는 극중에서 안 죽는 역이 없었으니까요. 신념이 깨져 죽고, 욕망을 못 이뤄서 제 풀에 죽고, 광기로 변해서 죽고. 끝까지 에너지가 소진되는 캐릭터들이었죠. 그런데 내레이터는 비교적 극을 편안하게 바라볼 수 있어요. 그러다보니 극을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됐죠."
그래서 관객들의 호불호가 갈리는 결말에 좀 더 수긍할 수 있다. 불황이 극에 달하던 1960년대 공업도시 리버풀이 배경인 '블러드 브라더스'는 돈을 구하기 위해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던 미키가 자신과 쌍둥이임에도 부잣집에 보내진 에디에 대한 시기와 원망 등으로 총을 쏘면서 급작스레 마무리된다.
문종원은 "삶에 대한 의문을 관객들에게 던지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주인공이 죽었으나 그럼에도 인생이 진행돼야 한다는 의미에요. 사람들은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뭔지 모르지만 열심히 살고 있잖아요. 뭐가 좋은지, 나쁜지 알기 힘들죠. '블러디 브라더스'도 그런 부분을 찾으려고 합니다."
무엇보다 내레이터 역으로 자신의 삶 역시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됐다. "예전에는 일방적으로 저를 불살랐어요. '레 미제라블'을 1년 동안 공연하면서 우울증에 걸리기도 했고요. '블러드 브라더스'에서는 쌍둥이의 죽음을 보지만 우리는 죽었다고 생각하면 안 되거든요. 억척스럽게 살아야죠. 이 연극 덕분에 극 안팎으로 정말 힐링이 됐어요."
결국 오랜 배우 생활을 위해 페이스 조절을 고민하게 됐다면서 "힘을 조절할 줄 아는 영리한 배우가 돼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전했다.
2003년 뮤지컬 '렌트'로 데뷔한 문종원은 "그동안 배우로서 초석을 다져왔다"고 감사해했다. "제가 현재 어떤 위치에 있는 건 아니지만 이제 기쁘게 직업 배우로서 희망을 품게 됐어요."
최근 뮤지컬스타 유준상(45)·박건형(37)을 비롯해 문근영(27) 등 톱배우들이 속한 나무엑터스와 계약을 맺은 것도 배우로서 새로운 커리어를 시작하는데 보탬이 될 듯하다.
"준상 형과 최근 영화를 함께 찍었는데 추천해주셨어요. 다양하게 표현하고 싶은 부분이 많은데 여러 장르에서 그런 것이 가능할 것 같아요."
최근 출연한 KBS 2TV 드라마 '빅맨'에서 그런 가능성을 엿봤다. "'빅맨'을 하면서 힘을 빼는 연기에 대해서 많이 고민했어요. 이후 출연한 '블러드 브라더스'의 내레이터 역에도 도움이 됐죠. 이전에는 욕심만 가득했는데 이제는 '렛 잇 고', 긴장 대신 많이 이완시키고 싶어요."
좋은 배우는 약점이 많은 배우라고 정의한 그는 "휴머니티가 묻어나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자신의 장점을 포장해서 보여주는, 기교적으로 연기를 잘하는 배우보다 좀 투박하더라도 진심을 그대로 보여주며 연기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느끼게 해주는 배우요"라며 눈을 빛냈다.
'블러드 브라더스'는 9월14일까지 홍익대 대학로아트센터 대극장에서 볼 수 있다. 프로듀서 김영욱·임양혁·송한샘, 연출 글렌 월포드, 음악감독 양주인, 무대디자인 오필영, 조명디자인 이우형, 음향디자인 강국현, 의상디자인 안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