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 조종림 기자] 1990년대 후반 홍대앞은 밴드 사운드로 들떴다. '크라잉넛' '노브레인' '닥터코어 911' 등이 수많은 밴드와 몇몇 독립레이블의 탄생을 이끌었다. '록 윌 네버 다이(RWND)'를 구호처럼 외치며 연명하던 록이 전성기를 맞은 듯했다. 그리고 그 시절 홍대의 한 축에 '예리밴드'가 있었다. 정확하게는 예리밴드를 이끌고 있는 '추장' 한승오(42)의 이야기다.
한승오는 1995년 메탈밴드 'DMZ 코리아'를 결성, 활동했다. 현재 예리밴드를 함께하고 있는 밴드 멤버들이 그를 '큰형'으로 부르는 이유다. "저를 인정해주고 찾아줘서 좋았어요. 지금은 동생이 아닌 동료로서 잘해주시죠"( 이학인), "예전에 제가 아기일 때 큰형 같은 분이셨어요. 멋있게 활동하는 분과 함께할 수 있어서 좋았죠."(남궁혁)
한승오는 1999년 셀프타이틀 앨범 'DMZ 코리아'를 발매한 뒤 2000년 일본의 세계적인 록밴드 '라우드니스'의 제작자에게 러브콜을 받기도 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데뷔시킬 다국적 록 밴드의 한 자리를 보장하겠다는 제안이었다. 한승오는 거절했다. 'DMZ 코리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기회를 버리고 밴드를 지켰지만, 시절은 위기를 동반했다. "메탈에 질렸었다. 왜 음악을 해야 하는지 몰랐다"는 고백이다. "'DMZ 코리아'를 12년 했을 무렵이에요. 신곡을 만들어도 재미없고 공연을 보러 와서 열광하는 사람들을 보면 신기했어요. 이런 게 뭐가 좋다고…. 경제적으로 힘든 건 괜찮았는데 음악의 방향성을 잃으니까 못 견디겠더라고요."
'닥터코어 911'에서 '서태지밴드'로 옮겨가 있던 20년지기 안성훈이 "장르를 바꿔보라"며 그를 끌었다. 한승오가 작업하면 안성훈이 확인하는 방식으로 6개월 동안 두 곡을 만들었다. 한국 록은 수준이 떨어진다는 편견을 가진 마니아들에 착안, 영어로 가사를 썼다. 일종의 블라인드 테스트였던 셈이다.
새로운 시도는 밴드 '부활'의 김태원에게 '이 음악은 미국 시애틀에 떨어뜨려도 먹힐 음악"이라는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너희 미국에서 음악할 거니?"라는 질문과 함께였다. 한승오는 밴드 '이모티콘'으로 활동했던 6년을 "소통면에서 부족했다"고 평했다.
"다시 열정을 끓어 올리는 법에 대해 알게 됐어요. 헤비메탈은 테크닉을 익히긴 어려웠지만, 작법은 단순했습니다. 반면, '이모티콘' 음악은 연주 난도는 쉽지만, 악곡을 타이트하게 풀어나가야 했죠. 탈장르를 해보니 자신감이 생겼어요."
직접 운영했던 'DMZ 합주실'을 찾은 유예리(27)와 함께하는 예리밴드는 한승오의 고민과 경험이 축적된 결과물이다. 예리밴드는 밴드의 개성을 유지하면서도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시도하고 있다.
"앞선 두 밴드의 음악을 할 때는 상업성을 배제하고 열심히 음악을 해서 본토 애들만큼 실력을 보여주면 인정받겠지 하는 생각뿐이었어요. 하지만 점점 문은 좁아지고 설 무대는 없어졌죠. 음악적인 회의가 들던 시기였습니다. 지금은 '나만 좋아하는 음악을 하면 뭐하느냐. 록 음악이 대수냐, 그렇게 대단한 장르냐. 사람들을 즐겁게 하고 위로해주는 게 음악의 역할이 아니냐'라고 생각하죠."(한승오)
지난달, 결성 5년 만에 처음으로 발표한 앨범 '로미오 마네킹'의 타이틀곡을 추리기 어려웠던 것도 같은 이유다. 밴드가 생각한 타이틀곡은 밴드 '시나위'의 '들리는 노래'를 리메이크한 '들리는 노래'였다. 대중과의 접점을 위해 전문 작사가에게 의뢰해 만들어진 '이리와 놀자'도 타이틀곡 후보였다. 하지만 타이틀곡은 "눈치 보지 않고 하고 싶은대로 지르자는 생각으로 만든" '로미오 마네킹'의 차지였다.
그룹 '동방신기' '소녀시대' 등 유명 아이돌의 뮤직비디오를 제작한 홍원기 감독이 "모든 사건의 주범"이다. "곡을 들어보더니 '로미오 마네킹'이 타이틀 아니에요?'라고 당연하다는 듯 말씀하셨어요. 타이틀곡이 다른 걸로 정해졌다고 말씀드려도 '로미오 마네킹으로 하면 안 되느냐' '이 곡으로 뮤직비디오를 찍으면 모든 걸 불사르겠다'며 계속 말씀하셨죠."(한승오)
홍 감독은 영화 '킬빌'을 연상시키는 감각적인 영상으로 '로미오 마네킹'의 뮤직비디오를 완성했다. 뮤직비디오는 정식 프로모션 전에 조회수 4만 건을 넘기는 등 주목받았고 줄줄이 달린 댓글도 우호적이었다. "한 스타일에 굳어져 있지 않은 다양한 곡이 담겨 있는 게 예리밴드의 장점이죠. 다양한 곡 안에서도 곡을 들었을 때 예리밴드의 곡이라는 걸 생각할 수 있는 공통분모도 있다고 생각해요."(예리)
'DMZ 코리아' 시절을 더하면, 밴드 생활 20년 째인 '추장' 한승오도 힘을 냈다. 그동안 엠넷 오디션프로그램 '슈퍼스타K3' 무단 이탈 논란 등으로 숱한 욕을 먹었던 그다. "그동안 욕을 먹고 위축이 많이 됐어요. 무대에 오르면 모두가 우리를 욕하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죠. 음악만 했지 소통하는 방법에는 서툴렀던 것 같아요. 그래도 다시 한번 거침없이 해보고 싶습니다. 저희 같은 밴드도 하나 정도는 있어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