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 김한나 기자] 깊은 상심에 빠져있는 듯하다. 배우 고아성(22)의 눈은 허공과 바닥을 헤맸다. 이윽고 두 눈에 눈물이 찼다가 빠지기를 반복했다. 영화 ‘우아한 거짓말’(감독 이한)에서 겪은 동생을 잃은 슬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채 허우적거렸다.
“평소에도 역할에서 빠져나오는 데 오래 걸리지만, 이번에는 필요 이상으로 깊이 빠진 느낌이에요. 실제로 없는 동생이 정말 죽은 것처럼 촬영 두 달 내내 큰 상실감으로 살았는데…. 여전히 쉽지 않네요.”
한 차례 거절했던 영화다. “모든 연기가 경험을 해봐야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면서도 학교폭력으로 자살한 동생을 둔 언니의 심정을 표현할 자신이 없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거나 진정한 사랑 등은 절대 경험을 안 해보고는 연기할 수 없는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동생을 잃은 슬픔도 마찬가지다. 아직 가까운 사람을 잃어본 적이 없다. 아무리 노력해서 연기한다고 해도 실제로 이러한 일을 겪은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것 같았다”는 양심의 문제였다.
“영화 자체는 매력이 너무 많았지만, 자신이 없었어요. 할 수 없이 거절하고 났더니 그 날부터 일주일 동안 제 주위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꿈을 꾸는 거예요. 어떤 날은 엄마, 어떤 날은 친언니, 오래된 단짝이 죽기도 하고요. 꿈에서 깰 때마다 안도하면서도 잠을 자기가 힘들었죠.”
고아성은 “꿈속에서 공통으로 애도의 과정이 드러났다”고 털어놓았다. 고아성이 영화에서 동생 ‘천지’(김향기)를 잃고 느끼는 감정이었다. “엄마가 죽는 꿈을 꿨다고 쳤을 때 꿈에서 나는 먼저 엄마가 곁에 없다는 사실을 부정했다. 하지만 아침에 눈을 떠서 주위를 둘러보고 엄마의 부재를 새롭게 인식했다. 씩씩하게 살겠다고 마음을 먹지만 억울하고 답답한 상황이 곧 찾아오게 됐다”는 것이다.
“영화에서 천지는 유서도 없이 자살해요. 유가족의 심정을 자세히는 아니었지만 몇 차례에 걸쳐 꾼 꿈으로 조금은 느껴졌어요. 결국, 감독님께 다시 전화를 해서 출연하겠다고 말씀드렸죠.”
영화는 학교에서 은근히 따돌림을 당하던 천지의 죽음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엄마 현숙(김희애)과 만지(고아성)는 딸과 동생을 잃은 슬픔에 함몰되지 않는다. “자극적인 주제지만 슬픈 얘기가 아니다. 사람이 한 가지 슬픔에 만 빠질 수는 없다. 즐거움도 공존하다. 유가족을 그리는 애도도 아니고. 따뜻하고 담백하게 그리려고 했다.”
“뉴스에 나오는 심각한 따돌림의 이야기가 아니에요. 수면에 떠오른 폭력과는 별개죠. 은근하게 상처주고 괴롭히고, 따돌리고 희열을 느끼는 거잖아요. 늘 있었는데 제대로 개념화가 안 돼 다 같이 공감하지 못해왔죠. 우리 영화가 그 부분을 잘 집어냈어요.”
덤덤한 척 말을 이어가다가도 목소리에 슬픔이 찼다. “향기가 ‘천지’를 너무 잘 표현해줬다. 피해자이고 표면적인 역할일 수 있는 천지에게 강인함을 입혔다. 그 친구의 연기가 관객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나도 자꾸 ‘천지’ 얼굴이 떠올라서 마음이 아프다”며 울먹였다.
“직업적인 사춘기가 온 것 같아요. 이 작품을 끝내고 나니 나름 고수해오던 연기가 옳았던 것인지 혼란도 오고요. 늘 영화 홍보하는 시점에 항상 다른 영화를 준비했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결정 못 했어요. 마치 전에는 이렇게 캐릭터에 빠져보지 못했다는 느낌까지 들고요. 앞으로 아무것도 못할 것만 같은 심정이 계속 반복되고 있죠.”
“이제껏 운도 좋았어요. 문득 무서워지기도 했죠. 그동안 제가 얼마나 좋은 배우들, 감독님과 작업을 해왔는지 깨달았거든요. 그만큼의 흥행성적도 아는데 성장하지 못하면 어떡할까 하는 두려움도 있고요. 보답해야 할 것 같아요”라며 마음의 짐도 고백했다.
힘겨워 보였다. 애써 “그래도 배우라는 직업은 행운”이라며 웃어 보였다. “‘설국열차’를 끝내고 실생활에 공존할 것 같은 캐릭터를 연기하고 싶었다. ‘우아한 거짓말’을 끝냈으니 다음에는 밝은 역할을 해야 할 것 같다. 한 사람으로 태어나서 여러 사람의 인생을 사는 건 즐거운 일이다”고 희미하게 답했다.
스물두살 고아성의 고민은 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