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 조종림 기자] 곱슬머리, 덥수룩한 수염이 인상적이다. 웃을 때는 눈가에 주름이 깊게 팼다. 껄껄거리며 호탕하게 웃다가 팔짱을 끼고 진지해지기를 반복했다. "오후에는 당을 채워줘야 해요"라고 눙치며 초콜릿을 건넸다.
배우 정진영(50)은 살갑고 다정했다. 영화 '왕의 남자' '이태원 살인사건' '7번방의 선물' 등 작품을 통해 쌓아온 과묵함이나 카리스마 넘치는 진지한 인물과는 거리가 있다. "그동안 제작자나 관객들이 나에게 딱딱한 역할을 기대했나 보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영화 '찌라시: 위험한 소문'(감독 김광식)은 기회였다. 기자 출신으로 아픔을 간직한 '지라시' 유통업자 '박 사장'을 연기했다. 아픔은 있지만 밝고 유쾌하며 의리의 인물이다. 매니저 '우곤'(김강우)이 지라시의 실체를 파헤치는 동안 옆에서 조력자가 돼 준다. '센 이미지'를 죽이기 위해 살도 8㎏이나 찌우면서 준비했다.
"4년 진행했던 '그것이 알고 싶다'의 이미지가 너무 강해서 하차했다. 그만둔 지 8년이나 됐는데 아직 따라붙는 걸 보면 원래 말랑말랑한 인상이 아닌가 보다"며 웃었다. 그러면서도 "이번 작품은 부드럽고 가벼운 인물이다. 나는 안 해봤던 연기라 재미있었는데 관객들은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하다"고 기대했다.
영화는 증권가 정보지(지라시)로 인해 여배우가 죽음을 맞이하면서 시작된다. 그녀의 신인 시절부터 함께해 온 매니저 우곤이 거대권력을 상대로 지라시의 실체를 파헤치는 이야기다. '도가니' '부러진 화살'같은 정통적인 사회고발 영화는 아니다. 오락성이 강하며 웃음을 통해 가볍게 풀어낸다.
정진영은 "제목만 보고 자극적이고 사회비판적 이야기를 원하는 관객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우리 영화는 그런 영화는 아니다. 한 사회에서 큰 권력을 가진 집단에 개인이 영향력을 발휘해 진실을 파헤치며 도전하는 낯익은 이야기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상황들을 통쾌하게 승리로 이끄는 현대사회의 변조된 히어로물"이라고 설명했다.
'블록버스터'라고도 표현했다. "세운상가, 충무로 인쇄 골목 등 재개발 안 된 건물들에서 촬영을 많이 했다. 낡고 세련되지 못한 배경은 영화의 거대권력이 가진 골프장과 번쩍이는 사무실과 비교된다. 힘없는 매니저가 그들과 싸우니 블록버스터다. '세운상가 블록버스터'라고 표현해야겠다"며 즐거워했다.
영화의 70% 이상은 김 감독의 철저한 고증에서 비롯됐다. 대기업, 청와대, 해결사 등이 개입된 지라시의 유통과정에도 어느 정도 현실이 반영됐다. "우리 영화는 실제를 인정하고 정당화하는 용도로 만들어진 게 아니다. 극화한 게 많은 재미있는 오락영화"라면서도 "내 생각에는 현실에서도 거대권력이 개입되고 있는 것 같다"고 봤다.
"연예인을 쥐락펴락하는 실체가 존재하는 것 같다. 스마트폰 등 정보 채널들이 많아졌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에는 정보를 전달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제는 쉽게 유통되고 그대로 믿어버리게 된다. 사실도 아닌 지라시에 넘어가는 사람들도 많다. 반대로 채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정보의 조작과 가공이 쉬운 사회가 돼 버렸다. 무서운 세상"이라며 한숨을 쉬었다.
어느덧 쉰을 넘어섰다. 연극으로 연기를 시작한 지 스물다섯 해가 지났다. 1998년 첫 영화 출연 이후만 해도 16년이다. 이름만으로 신뢰를 주는 배우가 됐다. "해가 지나도 연기에 대한 욕심은 줄지가 않는다. 오래 했으면 더 잘해야지. 일이라는 건 긴장 속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 긴장을 놓치는 순간 이상해진다. 앞으로도 긴장하며 더 연기를 잘하는 배우가 되고 싶다."
"예전에는 연기하기 위해 연구했는데 이제는 감정과 경험의 데이터들이 차곡차곡 쌓였어요. 나이를 더 먹으면 연기는 더 재미있겠죠. 작품이 줄어드는 건 감수해야 하겠지만, 이렇게 연기를 할 수 있다는 게 고마운 일이에요."
정진영은 '지라시: 위험한 소문' 개봉 전부터 SBS TV 드라마 '엔젤아이즈' 촬영에 들어갔다. "인연이 닿는 데까지 연기를 하고 싶다"는 천상배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