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 김부삼 기자]대선이 치러진지 벌써 1년이 다 되어가고 있는데도 정치권은 여전히 대선 프레임에 갇혀있는 모습이다. 국정원 등 국가기관의 대선개입 의혹은 더 커져 있는데도 여야는 그 어떤 합의를 이루지 못한 채 끝없는 정쟁과 공방만을 펼치고 있다. 예산 결산 및 새해 예산안 편성 등 연말 정국 할 일이 태산 같은데 꽁꽁 얼어붙은 정국은 풀릴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있다. 답답한 것은 박근혜 대통령 역시 마찬가지다. 거의 1년을 국정원 등의 대선개입 의혹으로 시달려왔으니 지칠 만도 한 상황이다.
박 대통령은 결국 오랜 침묵을 깨고 야당에 협조를 구하고 나섰다. 하지만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렸던 것인지, 야당은 박 대통령의 그 어떤 화해의 제스처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 박 대통령의 진정성에 끝없는 물음표를 던지고 있다. 당선 1주년이 다가오고 있는데도 정국은 여전히 찬바람만 불고 있다.
◆野, 두 번 당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최후통첩 보냈지만…
박근혜 대통령의 취임 후 첫 국회 시정연설을 하루 앞두고 있던 지난 17일, 민주당은 박 대통령에 대해 사실상 최후통첩이나 다름없는 압박 메시지를 쏟아냈다. 추석 연휴 직전 국회 3자회동을 통해 허탈함을 맛보았던 터라, 민주당은 이번만큼은 그냥 당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박 대통령에 대한 민주당의 요구는 명확했다. 국회 시정연설을 통해 국가기관의 대선개입 의혹 특검 및 국정원 개혁특위 설치에 대한 수용 입장을 밝히라는 것이었다. 아울러 남재준 국정원장 및 황교안 법무부 장관, 김관진 국방부 장관, 박승춘 국가보훈처장 등에 대한 해임도 받아들일 것을 촉구했다.
민주당 의원단은 이같은 요구사항을 들고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기자회견까지 열었다. 이들은 기자회견에서 “대통령의 결단만이 겨울 추위를 넘어 새 봄을 열 유일한 방법”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면서 “갑의 횡포와 불공정에 고통 받는 국민들은 박근혜 정부 취임 8개월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지난 대선에 맞춰져 있는 고장 난 시계를 들여다보며 긴 한숨을 내쉰다”, “하지만 해결책이 있다. 억압과 공포 속에서도 담대하고 끈질기게 이 땅의 민주주의를 지키고 삶의 희망을 놓지 않는 국민 모두에게 박 대통령이 직접 밝히면 된다”고 강조했다.
이어 “박 대통령이 ‘특별검사제를 도입하고 국정원 개혁 국회 특위를 구성하며, 이미 드러난 범죄행위에 대한 책임자를 처벌하여 문제를 매듭짓고 민생과 민주를 위해 매진하겠다’고 밝혀달라”면서 “국민들은 국회 시정연설에서 이 말씀을 기다린다”고 강력히 요구했다.
이들 뿐 아니라, 박용진 당 대변인은 같은 날 현안 브리핑을 통해 “박근혜 대통령 시정연설이 정국의 갈림길”이라고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박 대변인은 “대통령의 분명한 태도, 책임 있는 한 말씀이 필요한 시점”이라며 “시정연설에서 국민이 바라는 대로 특검으로 진상규명, 국회특위로 제도개혁을 이루자는 대통령의 책임 있는 ‘한 말씀’을 기대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박 대변인은 “대통령께서 시정연설에서 기대에 못 미치는 내용을 담는다면 어쩔 것이냐는 질문을 많이 한다”며 “대통령께서 시정연설에서 국민과 야당 요구를 외면하신다면 그 후 정국과 야당 대응은 ‘상상불가’, ‘예측불허’”라고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기도 했다. 박 대통령에 대한 사실상의 최후통첩 메시지였던 것이다.
◆朴대통령 첫 시정연설, 野 요구조건 사실상 모두 거절
그러나 지난18일 박근혜 대통령은 국회 시정연설에서 야당의 요구를 전면적으로 수용하지 않았다. 일면 전향적인 태도를 보인 듯도 했지만, 결론은 모두 수용 불가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이와 관련 박 대통령은 시정연설에서 정국 주요 현안과 관련해 “최근 야당이 제기하고 있는 여러 문제들을 포함해 무엇이든 국회에서 여야가 충분히 논의해 합의점을 찾아주신다면 존중하고 받아들이겠다”고 밝혔다.
사실상 자신에게 던져진 공을 다시 국회로 보낸 것이다. ‘여야 합의에 따른 수용’, 표현만 놓고 보면 박 대통령 입장이 기존의 한 발짝도 물러설 수 없다는 데서 조금은 전향적으로 변화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하지만 여당이 합의를 해주지 않는다면 얘기는 또 다르다. 지금껏 여당은 박 대통령의 의중에 따라 움직여왔기 때문이다. 야당이 결코 환영할 만한 메시지는 아니었던 셈이다.
박 대통령은 그러면서 “정부는 여야 어느 한쪽의 의견이나 개인적인 의견에 따라 움직일 수는 없다”며 거듭 “국회에서 여야 간에 합의해 주신다면 국민의 뜻으로 받아들이겠다”고 밝혔다. 또 “정부는 내년 지방선거를 비롯해 앞으로 어떤 선거에서도 정치개입의 의혹을 추호도 받는 일이 없도록 공직기강을 엄정하게 세워가겠다”면서 “국가정보기관 개혁방안도 국회에 곧 제출할 예정인 만큼 국회에서 심도 있게 논의하고 검토해 달라”고 당부했다. 야당은 국정원 개혁 특위 구성을 요구했지만 박 대통령은 ‘국정원의 셀프 개혁안’을 그대로 유지하겠다는 뜻을 명확히 밝힌 것이다.
아울러 박 대통령은 “지금 대선을 치른 지 1년이 돼가고 있는데 지금까지도 대립과 갈등이 계속되는데 대해 대통령으로서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며 “정부는 국민적 의혹이 제기된 사안들에 대해 빠른 시일 내에 국민 앞에 진상을 명확하게 밝히고, 사법부의 판단이 나오는 대로 책임을 물을 일이 있다면 반드시 응분의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박 대통령은 덧붙여 “이제는 대립과 갈등을 끝내고 정부의 의지와 사법부의 판단을 믿고 기다려달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사법부의 판단을 기다려달라는 것 역시 특검을 수용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던 것이다. 즉 박근혜 대통령은 표현을 완곡하게 했지만 야당의 요구를 단 하나도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국회 시정연설에서 못 박아 밝힌 셈이다.
민주당은 시정연설이 끝나자마자 분노하며 국회 본청 앞 계단에서 박근혜 정권에 대한 규탄대회를 개최했다. 전병헌 원내대표는 “박근혜 대통령의 시정연설은 우리 국회가, 그리고 야당과 국민이 시정을 요구한 것은 하나도 시정되지 않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내용이었다”며 “한마디로 각개무사를 내세워서 불통을 선택했다”고 거친 비난을 쏟아냈다. 대통령 시정연설이 여야 갈등만 더 키운 꼴이 된 것이다.
결국 새누리당이 국정원 개혁특위를 수용하고 특검은 수용 불가라는 중재안을 내놓았지만, 민주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3가지 요구사항과 함께 최후통첩을 보냈던 민주당은 더 이상 협상은 없다며 단호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1년을 끌어온 문제지만 앞으로 4년을 더 이어갈 문제로 전환되고 있는 모양새다. 민생 외면 비판을 받고 있는 민주당도, 야당 포용 없이 진실을 감추려고만 드는 박근혜 정권도 모두에게 손해일 수밖에 없다. 1년 가까이 문제를 풀어내지 못하고 있는 여야 정치권에 대해 국민들의 실망이 점점 더 깊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