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70~80년대 '민주화 운동의 대부'로 불리던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30일 오전 5시31분께 향년 64세로 별세했다.
1947년 2월14일 경기 부천에서 출생한 김 상임고문은 1965년 서울대 경제학과에 입학한 뒤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이후 71년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으로 2년간 수배를 받는 등 20여년간 시국사건의 중심에서 활동하며 수배와 투옥을 반복해 왔다.
결국 전두환 정권 시절인 85년 9월4일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을 결성했다는 이유로 구속됐고, 서울 용산구 남영동 분실로 끌려갔다.
그는 남영동 분실에서 보름동안 갇혀 있으면서 고문기술자 이근안씨로 부터 8차례의 전기고문과 2차례의 물고문을 당했다.
1995년 정계에 입문한 그는 96년 서울 도봉갑에서 제15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이후 17대까지 내리 3선을 했다.
고(故) 노무현 정부 당시 보건복지부장관을 역임했으며, 2006년 열린우리당 의장을 지냈다.
하지만 2008년 제18대 총선에서 한나라당 신지호 의원에게 1200표 정도 차이로 패하면서 낙선했다.
'신사'로 불렸던 그는 조용하고 합리적인 성품으로 여야에 적이 없었지만, 필요할 때는 권력에 맞서 목소리를 냈다.
김대중 정부 당시 김 전 대통령 측근인 동교동계 해체를 가장 먼저 주장했으며,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계급장 떼고 치열하게 논쟁하자"고 말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민주화 운동 당시 고문으로 죽음의 문턱을 넘나든 그는 후유증으로 비염과 축농증에 시달렸으나 고문 트라우마로 인해 치료를 미루다가 2006년 수술을 받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손 떨림은 심해졌고 한여름에도 한기와 콧물로 인해 고생했으며, 고문을 받았던 초가을만 되면 한 달여간 외출하지 못할 정도로 정신적 고통도 심하게 겪었다.
특히 2007년 12월 경직·느림·자세 불안정·손 떨림 등의 증상을 보이는 파킨슨병 확진을 받았다.
의학적으로 고문 후유증과 파킨슨병의 인과관계가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측근들은 고문이 파킨슨병의 주요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파킨슨병 치료를 위해 약물을 복용하며 꾸준히 운동 등 활동을 했다. 지난달 29일 정밀진단 결과 뇌정맥에서 혈전이 발견돼 서울대병원에 입원했다.
뇌정맥혈전증으로 입원 중이라 지난 10일 딸의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못한 것으로 전해져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그는 29일 합병증이 진행되면서 병세가 갑자기 악화돼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30일 결국 숨을 거뒀다.
그는 야권 대통합과 양극화 해소 등 사회적 대타협을 도출하기 위해 내년 4월 19대 총선 출마에 강한 의지를 보여 왔다. 그러나 마지막 꿈을 펼치지 못하고 굴곡진 생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