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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공화국’과 ‘주식회사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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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아 - 문학평론가, 이화여대 연구교수

세상이 한줌도 안되는 세력의 거대한 음모에 좌우된다는 설정, 엄청난 사건들이 드러나지 않은 배후에서 비롯되었음을 하나하나 파헤치는 줄거리는 익숙한 플롯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의 흥미를 돋운다. 이런 거대 음모를 틀로 삼은 영화에서 가장 전형적인 음모의 주체는 정부기관의 권력자이다.


그러다 가끔은 <에일리언>이나 <아이 로봇>에서 그렇듯이 주모자가 ‘회사’로 지칭될 때도 있다. 사실상의 국가권력 혹은 그 이상을 획득한 하나의 거대 기업이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다. 이런 구도 또한 식상해졌는지 어느 순간부터는 두 유형을 뒤섞어 정부기관과 기업을 다 아우르는 ‘거대 음모조직’이 등장했다. 여기서는 정치와 경제, 권력과 돈 사이의 일말의 경계도 해소되고 오로지 해당 조직의 이해관계만이 절대적인 목표이자 기준으로 작용한다.


한국판 음모론 만들어낸 ‘신종 법치’


이런 설정에서 거부할 수 없는 리얼리티가 느껴지는 것이 요즈음의 한국사회이다. 심지어 그 거대조직의 이름도 공공연히 거론된다. ‘대한민국 1%.’ 그럼에도 이런 사태는 박진감 넘치는 음모론의 소재가 되어주지는 않는다. 모름지기 음모란 적발과 폭로에 무너지는 것을 그 운명으로 하여 성립한다. 다시 말해 최소한의 정의를 위한 기본적인 법적·도덕적 시스템을 배경으로 해서 그 음습한 본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음모조직의 구상은 더 이상 음지에 있지 않고 스스로 사회의 공인된 운영원리임을 밝히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햇빛을 받아도 죽지 않는 진화된 뱀파이어처럼 이제 불법과 비리는 백주대낮을 버젓이 활보한다. 이같은 음모의 자기진화를 위한 기제가 바로 오늘날의 해괴한 ‘신종 법치’이다. 불법적인 것들의 합법화, 그리고 이를 위해 합법적인 것에 시비를 거는 일이 바로 이 새로운 ‘법치주의’의 목표였던 모양이다.


그들 뒤에는 政·法·言의 커넥션이


양심선언을 통해 삼성의 비리를 폭로하고 수사를 촉구했던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한다>(사회평론 2010)는 최대 기업의 비리 전모, 면죄부 발급과정에 다를 바 없던 사법절차, ‘글로벌’ 기업의 ‘중세적’ 운영과 비뚤어진 기업문화를 파헤친 일종의 문화연구적 분석을 제시하면서 무엇보다 관민(官民)의 경계를 두루 꿰어 진행되는 음모의 합법화 패러다임을 선명하게 보여준다(이 책 자체를 둘러싸고 현재 진행되는 또다른 노골적 음모에 대해서도 이미 알려진 바 있다). 이제 사태는 일개 기업의 비자금과 세습과 로비가 아니라 정부·사법·언론의 광범위한 비리 커넥션과 ‘이래야 주류다’는 식의 파렴치한 지배이념의 문제가 된 듯 보인다.


책머리에 붙은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추천의 글’에서 “대한민국의 부패상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라고 한 것은 우리 모두가 이런 부패상에 일정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반성해야 한다는 얘기지만, 그만큼 중요한 또 하나의 의미는 관련성의 크고작음을 떠나 부패는 우리 모두의 삶을 잠식하고 있다는 무서운 사실을 환기시키고자 함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야말로 ‘강호(江湖)의 도덕과 상식이 땅에 떨어진’ 사태를 낱낱이 증언하는 이 책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그저 읽어보시라는 말로 대신해야겠지만 저자의 의도가 ‘이 더러운 세상’이라는 개탄과 냉소와 자조에 있지 않고 ‘삼성과 한국이 함께 사는 길’의 모색에 있다는 사실을 먼저 짚어두어야 하겠다.


삼성 경영진과 현 정권, 어딘지 닮았다?


책을 읽으며 내내 지워지지 않는 인상은 삼성과 ‘주식회사 대한민국’의 닮은꼴이었다. 여기서 ‘주식회사 대한민국’이란 물론 대한민국을 일개 주식회사로 보는 사람들의 의식 속에 존재하는 대상을 가리킨다. 구성원의 비리와 불법에 전혀 개의치 않으며 오히려 그것을 능력과 융통성의 증거로 추켜세우기, 사적 충성에 근거한 인맥의 구축과 패거리 의식에 바탕을 둔 나눠먹기, 일상화된 통제와 감시기제 같은 갖가지 행태가 그런 닮은꼴들이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삼성 경영진은 자신들이 실제로 국가를 운영한다고 믿는다는데 이 믿음은 자신들이 기업을 경영하고 있다는 정권 ‘경영진’의 믿음을 그대로 상기시킨다.


저자는 삼성 경영진에게서 이같은 국가 운영자라는 자기규정과 국익에 대한 무관심이 양립하는 게 이상하다고 꼬집는데, 더욱 섬뜩한 일은 이제 ‘국가 운영자는 공익을 위해 일한다’는 상식적 판단기준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는 점이다. 사익이 아닌 공익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 아니 그런 영역에 대한 무지라고 해야 더 옳을 것 같은 심성과 사고방식이 삼성 경영진과 실제 국가 운영자들의 가장 뚜렷한 공통점으로 보인다. 이것이 그저 우연일 리는 없다. 국가를 하나의 기업과 등치시키는 발상과 그 발상을 은연중에 용인한 우리의 의식이 삼성‘공화국’을 낳았고 이 ‘공화국’이 다시 공공성의 의미를 조롱한 악순환의 결과일 것이다.


저자는 양심선언을 위해 끝내 사제단을 찾아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하며 “상대가 삼성이 아니었다면 달랐을 게다. 상대가 정부였다면, 혹은 다른 재벌이었다면 오히려 남보다 먼저 문제를 공론화하려고 경쟁을 벌였을 게다. 그런데 삼성에 대해서는 다들 무서우리만치 조심스러워했다. 서로 공을 떠넘겼다”고 회고한다. 그러나 정부나 다른 재벌이었다면 ‘먼저 공론화하려고 경쟁을 벌였다’는 이야기를 지금도 할 수 있을까, 또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삼성을 대하는 방식이 이제 정부와 여타의 재벌을 대하는 방식으로 자리잡고 있지 않은가. 언론까지 노골적으로 장악하려는 현 정권의 시도에서 그런 불안감은 더욱 깊어만 간다.


민주주의를 지키고 영혼을 회복하는 길


엉터리로 일관한 삼성 비리 재판에서 가장 엉터리였다는 2심 판결을 놓고 사제단의 김인국 신부가 ‘전 국민의 영혼을 오염시킬 것’이라고 한 경고는 더없이 엄중하게 받아들여져야 한다. 밝혀질 만큼 밝혀졌는데도 음모론 플롯의 결말처럼 카타르시스가 주어지기는커녕 새로운 좌절이 앞을 가로막은 상황이다. 불법과 불의가 아니라 이 좌절과 무기력에 진다면 우리 모두는 더없이 황폐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싸움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 것이며 지금 자신들이 바로 ‘세상의 이치’라며 뻔뻔하게 머리를 치켜세운 무법과 부도덕과 불의는 민주주의의 문제이면서 또 우리 영혼의 문제이다.


정치적 문제를 도덕적 선악 문제로 치환하는 경향을 늘 못마땅하게 여겨왔지만 이제 그것이 지닌 함의를 실감한다. 이건 ‘근본주의적’ 싸움이고 여기서 지면 우리는 더도 덜도 아닌 바로 영혼을 잃게 되는 것이다. <삼성을 생각한다>의 저자처럼 분연히 싸움에 나서지는 못할지라도 최선을 다해 그들의 삶의 방식이 얼마나 시시하고 더럽고 치사한지를 경멸해주고 원칙과 정의의 보편적 가치를 더욱 소중히 여기는 것에서 시작하자.


* 본문은 디지털 창비 논평이며,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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