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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야기

【오병욱 산 이야기】 산에서 배우는 인생(17) - 인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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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뉴스 오병욱 칼럼니스트]  몇주의 산행 중지 후에, 코로나 감금이 답답한지 인왕산 산행 공지가 카톡 통신에 떴다.


매년 몇 번씩 오르는 인왕산. 산행 집행부의 집콕의 갑갑함과 원거리, 장시간 산행은 피하고 싶은 가벼운 마음이 읽힌다. 그래도 반가운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기회가 반가워 경복궁역 1번 출구로 향한다. 조금 일찍 도착한 경복궁역 안내판에서 서촌의 내력을 읽는다. 


서촌은 조선 시대 인왕산과 경복궁 사이의 지역으로 조선 시대에는 중인과 서인들이 많이 살아, 정선, 김홍도, 김상헌의 자손인 장동 김씨의 터전이 되었던 지역이기도 하고, 근대에는 이상, 윤동주, 노천명, 화가 박노수, 이상범 등 시인과 화가 등이 많이 살았던 지역이며 현재는 세종마을이라 칭한다는 안내가 있다.


온도는 영하의 날씨이지만 하늘은 화창하다. 사직동 쪽으로 올라 언제나처럼 수성동 쪽으로 길을 잡는다. 자주 보는 풍경이지만, 지하철역에서 읽었던 안내문의 영향인지 오늘은 ‘백석, 흰 당나귀’라는 카페의 상호가 눈에 보인다. 


그렇지! 백석도 통인동의 어느 하숙집에서 조선일보에 출근하며 일본 식민지 시절 한국 문학의 순수성을 지켜낸 인물이었지. 


한겨울에는 폭설이 제격이고, “가난한 내가/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폭푹 눈이 내린다”로 시작하는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싯귀는 아직도 내 가슴속 한겨울의 풍경으로 자리 잡고 있다. 


백석 평전을 쓴 시인 안도현은 “첫눈이 내리는 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말은 백석  이후에 이미 죽은 문장이 되고 말았다”며 눈에 얽힌 사랑은 백석을 따라갈 사람이 없다고 선언하지 않았던가. 백석의 사랑, 20대의 일제 식민지 시절, 자야라는 애칭의 기생과의 사랑은 오늘에도 따라갈 수 없는 불멸의 동화로 남고 말았다. 


1000억원이 넘는다는 요정 대원각을 법정 스님에게 기부하며, “1000억의 재산도 백석의 시 한 줄만 못하다”는 길상화 김영한의 말은 아무리 암울한 일제 강점기에도 천금보다 귀한 백석과의 사랑이 우리의 가슴을 어느 정도 훈훈하게 한다. 


수성동 계곡 조금 못 미쳐는 ‘윤동주의 하숙집터’라는 안내판도 보인다. 백석의 첫 시집인 ‘사슴’을 그렇게 읽고 싶다 했다는, 프랑시스 잼과 라이너 마리아 릴케를 사랑한 일제 강점기의 순수시인 윤동주. 백석과 윤동주, 그들은 반일감정을 가지고 굴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민족주의자였고, 백석은 구속받지 않는 연예를 꿈꾸던 청년이라는 점에서는 자유주의자이었다. 정말 서촌은 우리 문학의 독보적 감성을 키운 마을이구나. 


쓸데없는 감상으로 도착한 수성동 계곡에서 산행을 시작한다. 매번 가던 길을 피해 오늘은 석굴암으로 향해 잘 다듬어진 데크 계단을 한없이 오른다. 오르다 보면, 약간 너른 공터가 나오고 뒤돌아보면 서울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석굴암 앞의 전망대에 올라 치마 바위를 바라보니 인왕산 정상 밑의 큰 바위가 치마 주름처럼 선명한 굴곡을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단경왕후 신 씨와 중종의 사랑 전설이 얽혀있는 치마 바위의 전설이 생겨난 것일까. 야사에 따르면 중종은 비록 반정공신들의 압박을 못 이겨 신 씨를 내쫓았지만 그래도 마음속으로는 매우 그리워해서 신씨가 폐출되어 나와 있던 사가 방향을 자주 바라보았다고 한다. 그 사실을 전해 듣고 신 씨는 자기의 붉은 치마를 인왕산의 바위 위에 중종이 볼 수 있도록 걸어놨다고 한다. 


얼떨결에 왕위에 오른 중종의 비애일까, 고모에 이어 조카까지 폐비가 된 신씨 가문 왕비의 비애일까 치마 바위의 전설은 권력의 무상함을 보여주는 듯하다.


석굴암은 치마바위 아래 바위틈의 공간을 이용하여 삼존 석불을 모셔 놓았다. 같이 간 친구가 부처님께 절을 하며 무언가를 소원한다. 안내문에는 예부터 한양 전경이 잘 보이는 명당으로 인왕산의 기를 받아 기도발이 잘 듣는다는 설명으로 소원을 비는 간절한 사람들이 자주 찾아온다고 한다. 나도 마음속으로 갑자기 바뀐 세상에 사랑을 잃고 쓸쓸히 살다간 단경왕후의 안녕을 빌어 본다.


끊어진 산길을 다시 돌아 산속 숲길을 따라 석굴암 약수터를 지나 인왕산 정상을 향한다. 성곽길로 접어서니 등산객이 많이 보인다. 젊은 남녀 등산객들과 앞서거니 오르니 정상에는 제법 많은 사람이 모여 사방을 조망하며 휴식을 취한다. 우리도 정상에서 사진을 찍고 가져간 음료와 간식을 나누며 잠깐의 휴식을 취한다.


하산길은 청운동 쪽의 윤동주 문학관을 지나 창의문을 통해 와룡 공원으로 방향을 정하고 출발했으나, 백악산 출입 제한 시각이 생각나 도중에 기차바위 쪽으로 방향을 수정했다. 인왕산의 바위는 크고 넓어 기묘한 절경을 나타낸다. 

 


창의문 밖 안평대군의 별장 무계정사(武溪精舍) 터나 석파정(石坡亭)이 이 인왕산 자락에 있지 않은가. 인왕산 자락의 석파정은 얼마나 탐이 났으면 대원군이 당대 최고 권문 세력인 장동 김씨 김흥근의 삼계동정사(三溪洞精舍)를 임금을 대동하는 수를 내어 인계받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대원군은 이 별서(別墅)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주변 풍경이 온통 바위산이라 자신의 호마저 석파(石坡 · 돌고개)로 바꾸었고 집 앞 개울의 정자를 석파정이라고 하였다. 석파정 주변으로는 노송들이 자리 잡고 있는데 이 노송은 이름이 ‘천세송(千歲松)’이라 하지 않던가. 


기차바위 주변도 이리 휘고 저리 휜 소나무들로 가득하다. 경주 흥덕왕릉 주변의 구부러진 소나무가 특히 유명해 ‘안강목’(흥덕왕릉이 자리한 곳이 경주 안강읍)이라 한다던데, 이리저리 굽어진 모습이 고전 무용수가 승무를 추는 여인의 긴 소매같이 역동적이다. 굽은 모습에 편안함을 느끼는 것이 노자의 도덕경 글귀 곡즉전(曲卽全 : 굽으면 온전해지고)를 떠올리기도 한다. 기차바위 주변의 굽은 소나무는 추운 겨울 하늘에 그 푸른빛이 더욱 검푸르게 보인다.


소나무 숲을 지나 홍제동으로 내려오는 길은 잡목이 우거졌다. 메타세콰이어 숲도 보인다. 가까이 있으면서도 자주 느껴보지 못한, 위에는 푸르름을 간직한 소나무와 아래는 땔감으로 쓰였을 잡목으로 우거진 우리 명산 인왕산을 느낀다. 내려온 홍제동 인왕산 자락은 아파트 단지가 가득이다.


편안한 산행 뒤의 정감이랄까 안도감이 온몸을 감싼다. 이런 날 함박눈이라도 펑펑 내린다면 북한에서 붉은 편지에 밀려 멀리 개마고원의 삼수 협동농장에서 생을 마감한 백석이 떠오를 것 같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 밤이 좋아서 웅앙웅앙 울을 것이다.” 


[편집자 주 : 외부 칼럼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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