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 김한나 기자] 탄탄한 몸매, 포마드를 발라 단정하게 빗어넘긴 머리, 깔끔하게 정돈된 수염, 고급스러운 검정색 뿔테 안경, 완벽한 핏의 더블 브레스티드 핀스트라이프 슈트, 새하얀 셔츠, 레지멘털 타이, '브로그 없는 검은색 옥스퍼드 구두!(oxford without brogue)', 그리고 한 손에는 검은색 장우산을 든 신사가 클럽 안으로 들어선다.
한껏 바지를 내려 입은 남자들과 최대한 야하게 차려입은 여자들 한가운데 선 그가 '저건 웬 샌님이야'라는 눈초리를 간단히 무시하고 클럽 안을 조용히 돌아본다. 잠시 후 DJ에게서 건네받은 스냅백을 머리 위에 걸친 그가 힙합, 록, 일렉트로닉 등 다양한 음악에 맞춰 누구보다 신나게, 누구보다 격렬하게, 누구보다 유쾌하게, 누구보다 멋들어지게 춤을 춘다. 두 시간 동안 춤을 춘 그가 스냅백을 벗고, 머리를 정돈하고, 옷매무새를 매만진 뒤 클럽을 유유히 빠져나가면서 말한다. '예의가 사람을 만든다(Manners makes man).'
간단히 말해 영화 '킹스맨:시크릿 에이전트'(감독 매슈 본)는 이런 영화다. 2월이 채 지나지 않았다. 너무 섣부른 판단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오락영화로 한정했을 때 아마도 올해 '킹스맨'보다 뛰어난 영화는 나오지 않을 것 같다. '킹스맨'은 완벽하지 않지만, 날것으로 온전하다. 생선의 진짜 맛을 알려면 회를 먹어보라는 말에 매슈 본 감독은 바다에서 갓 잡아 팔딱거리는 생선을 통째로 입속으로 집어넣고 생선 피를 입가에 흘리며 웃으면서 씹어 먹는다.
좋은 신체 능력과 뛰어난 머리를 가진 에그시(태런 애거튼)는 평온하지 않은 가정환경 탓에 재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뒷골목에서 말썽이나 피우는 양아치 신세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정체를 알 수 없는 신사 해리(콜린 퍼스)가 나타난다. 에그시 아버지에게 목숨을 빚졌다는 그는 에그시에게 일종의 비밀요원이자 현대판 기사(騎士)인 킹스맨이 될 기회를 주겠다고 말하고 잃은 게 없는 에그시는 해리를 따라 나선다.
'킥애스:영웅의 탄생'(2010) '엑스맨:퍼스트 클래스'(2011)를 연출했을 때도 그랬다. 매슈 본 감독에게는 어떤 콤플렉스도, 어떤 자격지심도 없어 보인다. 그저 자신이 좋아하는 요소들을 한 영화 안에 죄다 끌어다 놓고 마구 섞은 뒤 관객에게 맛볼 것을 권한다. 그렇게 섞어 버렸으니 시나리오, 촬영, 편집, 연기, 음악, 액션, 유머, 대사, 세세한 디테일까지 어디 하나 관습적인 데라고는 찾을 수 없다. 뻔한 무언가가 나오려고 하면 감독은 극 중 인물을 통해 그것을 비웃어버림으로써 예상을 벗어난다. 재밌는 건 매슈 본 감독은 자신이 내놓은 결과물이 관객에게 어떤 영화적 짜릿함을 줄 것인지 알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면에서 매슈 본은 유럽의 쿠엔틴 타란티노처럼 보이기도 한다.
'킹스맨'은 모든 스파이 액션 영화에 보내는 헌사와 같은 영화다. 동시에 모든 스파이 액션 영화를 조롱하는 영화다. 다시 말해 영화로 장난을 치는 영화다. 가장 슬퍼야 하는 순간에도, 가장 기뻐야 하는 순간에도 매슈 본은 진지해지지 않는다. 그는 한편으로는 흔한 감상주의에 빠지려는 관객조차도 비웃으며 시니컬한 농담을 시종일관 던진다. 가장 결정적인 위협을 폭죽 쇼로 전환하고(영화를 보면 무슨 말인지 알 수 있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영어 욕을 섞은 "거길 또 들어가라고요?" 같은 대사를 집어넣었다. 관객은 러닝타임 내내 낄낄대며(박장대소가 아니다) 영화를 볼 수 있다.
매슈 본이 뛰어난 연출가인 이유는 그 난장이 철저한 통제로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킹스맨'은 에그시가 킹스맨으로 거듭나는 성장의 서사와 에그시의 이야기와는 관계없이 벌어지던 해리의 스릴러 서사를 아무런 이물감 없이 이어붙이는 데 성공한다. 산발적으로 쏟아지는 듯한 에피소드와 설정,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반드시 후반부에 가서 거둬들이며 그것으로 의심의 여지 없는 재미를 만들어내는 재능은 흔하지 않다. 앞서 언급한 폭죽 쇼 또한 이 한 장면이 주는 한순간의 쾌락을 위해 러닝타임을 충분히 들여 복선을 깔아 두기도 한다.
영화의 또 다른 볼거리는 역시 액션이다. '킹스맨'의 액션은 클로즈업과 슬로 모션, 퀵 모션을 자유자재로 다루며 역동성을 더한다. 인물이 액션을 펼치는 모습을 사방에서 촬영하고, 그 인물은 사방에 있는 적을 동시에 여러 방향에서 상대함으로써 증폭한다. 상대를 공격하는 주인공의 신체에 카메라를 달아 액션에 속도감을 준다. 타란티노, 청룽, 박찬욱, 워쇼스키, 폴 그린그래스의 액션을 참고한 부분도 여럿 보인다. 매슈 본은 자신만의 액션 스타일에 그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감독들의 장기를 섞어 극대치의 액션을 선보인다. 다르게 보면 매슈 본 감독은 '킹스맨'을 통해 모든 액션 영화에 대한 감사함을 표하는 듯하다.
콜린 퍼스는 자신이 몇몇 영화에서 선보인 영국 신사의 이미지를 보여줌과 동시에 캐릭터에 극한의 터프함까지 더해 오직 콜린 퍼스만이 할 수 있는 연기를 녹여낸다. 악당 밸런타인을 연기한 사무엘 잭슨의 연기는 두말할 나위 없이 훌륭하다. 장난기와 서늘함을 동시에 가진 인물을 잭슨은 특유의 카리스마로 완전히 장악한다. 두 연기 귀신들이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음에도 힘이 넘친다. 태런 애거튼, 마이클 케인, 마크 스트롱도 제몫을 다했다.
매슈 본 감독은 애초 '킹스맨'을 걸작이나 명작으로 불릴 만한 영화로 만들어야 한다는 야망이 없어 보인다. 그의 의도대로 '킹스맨'은 그런 작품이 아니다. 그런데도 '킹스맨'이 뛰어난 영화인 이유는 그의 태도 덕분이다. 영화가 왜 장난이면 안 되느냐고 반문하면서 매슈 본은 완전한 장난을 친다. 예절이 사람을 만든다면 좋은 태도는 좋은 영화를 만든다. 매슈 본은 '킥애스'와 '엑스맨:퍼스트 클래스'를 뛰어넘는 작품을 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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