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 홍경의 기자] 14일 최종현학술원 과학기술혁신위원회가 발간한 『AI 주권 시대, 대한민국의 선택』 보고서는 한국 사회를 지배해 온 ‘추격의 압박’부터 정면으로 짚는다. 미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초거대 AI 모델 경쟁이 격화되면서 한국 사회에도 “서둘러 대응하지 않으면 뒤처진다”는 불안과 조급함이 커지고 있다. 그러나 보고서는 지금 필요한 것은 속력이 아니라 방향, 액션이 아니라 전략이라고 제언한다.
이번 보고서는 최종현학술원 과학기술혁신위원회(이하 과기위) AI 전문 위원과 외부 전문가 12명이 참여한 미래 과학기술 소모임의 심층 논의를 바탕으로 기획됐다. 이후 과기위 전체 워크숍을 통해 논의를 공유·확장·정리해 보고서로 완성했다.
학계에서는 김기응 KAIST 전산학과·김재철AI대학원 석좌교수, 김용대 KAIST 전기및전자공학부 ICT 석좌교수, 서영주 POSTECH 컴퓨터공학과 교수·인공지능연구원장, 신진우 KAIST 전기및전자공학부·김재철AI대학원 ICT 석좌교수, 신창환 고려대 전기전자공학부·반도체공학과 교수, 안정호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교수, 오혜연 KAIST 전산학부 교수, 윤성로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교수, 정송 KAIST ICT 석좌교수·김재철AI대학원장, 차상균 스탠퍼드대 인간중심AI연구소(HAI) 석학 펠로우·아시아소사이어티 석학 펠로우, 최재식 KAIST 김재철AI대학원 교수·인이지(INEEJI) 대표, 한보형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교수, 홍용택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교수가 참여했다.
산업계에서는 김윤 트웰브랩스 최고전략책임자(CSO), 김지원 SK텔레콤 AI 모델 연구소장, 박성현 리벨리온 대표, 성낙호 네이버클라우드 하이퍼스케일 AI 기술총괄이 현장 관점을 제시했으며, 투자 분야에서는 이경훈 글로벌브레인 한국 대표가 논의에 함께했다.
이와 함께 최태원 SK그룹 회장 겸 최종현학술원 이사장이 참여해, AI 주권을 둘러싼 산업 전략과 사회적 함의에 대한 종합적 논의를 이끌었다.
보고서가 던지는 핵심 질문은 분명하다. “무엇을 할 것인가”가 아니라, “왜 해야 하는가, 어디로 가야 하는가”다. 기술 경쟁의 속도전에 매몰된 나머지 국가 차원의 목표와 책임 범위를 명확히 설정하지 못하면, AI 전략은 출발선에서부터 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김유석 최종현학술원 대표는 발간사에서 “AI 주권은 모든 것을 직접 만들겠다는 선언이 아니라, 국가가 반드시 통제해야 할 영역과 글로벌 협력을 활용할 영역의 경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에 대한 전략적 결정”이라며, “지금 필요한 것은 기술 경쟁의 속도 못지않게 방향, 즉 국가 차원의 목표와 책임 범위를 분명히 설정하는 일”이라고 밝혔다.
“오픈소스면 충분하다?”… 개방은 언제든 통제가 된다
보고서는 소버린 AI 논쟁을 찬반 구도로 단순화하는 접근에서 벗어난다. 국산이냐 글로벌이냐의 선택이 아니라, 소버린 AI가 무엇을 얻고 무엇을 포기하는 선택인지를 냉정하게 비교해야 한다는 것이다.
보고서가 소버린 AI 찬성 논리의 출발점으로 지목한 것은 이른바 ‘오픈소스의 함정’이다. 오픈소스는 중립적이고 개방적인 대안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글로벌 빅테크가 시장 지배력을 확대하기 위해 활용하는 전략적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장기간 무료 제공으로 경쟁자를 소진시킨 뒤 지배력을 확보하고, 이후 수익을 회수하는 방식이다. 라이선스 조건이나 접근 권한 역시 업데이트와 정책 변경에 따라 언제든 바뀔 수 있다. 결국 오픈소스가 문제가 아니라, 핵심 디지털 인프라를 글로벌 민간 기업의 선의와 전략에 의존하는 구조를 국가 전략으로 삼는 것 자체가 위험하다는 지적이다.
여기에는 데이터 주권의 현실적 제약도 함께 거론된다. 미국의 「합법적인 해외 데이터 활용 명확화법(Clarifying Lawful Overseas Use of Data Act, CLOUD Act)」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미국 기업이 운영하는 해외 데이터센터에 저장된 데이터에 대해서도 접근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
유럽연합(EU)을 포함한 주요국들 역시 안보와 범죄 수사를 명분으로 국경을 초월한 데이터 접근 권한을 점차 확대하고 있다. 행정·보건·국방과 같은 국가 운영의 핵심 데이터를 글로벌 클라우드 인프라 위에 탑재하는 선택은 장기적으로 심각한 전략적 리스크로 작용할 수 있다는 문제의식이다.
“소버린 AI, 올인도 포기도 아닌 ‘통제할 것’과 ‘협력할 것’을 구분하는 전략 필요”
보고서는 소버린 AI에 대한 반대 논리도 함께 제시한다. 핵심 쟁점은 비용이다. 소버린 AI는 구조적으로 고비용일 수밖에 없으며, 초거대 모델 경쟁은 한 차례의 개발로 끝나는 사업이 아니라 연산 인프라 확충과 지속적인 고도화, 운영 비용을 장기간 감당해야 하는 소모전에 가깝다는 지적이다.
정책의 연속성 역시 현실적인 변수로 꼽힌다. 공공 재원이 전면 투입되는 구조에서는 정권 교체나 정책 기조 변화가 곧바로 사업의 지속성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보고서는 장기간의 축적과 일관성이 요구되는 AI 개발에서 이러한 불확실성 자체가 무시하기 어려운 전략적 리스크라고 지적한다.
기술 적용 방식에 대한 우려도 제기된다. 성능이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거대 언어 모델(LLM)을 ‘국산’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분야에 일괄 적용·강제하는 접근은 소버린 AI의 취지와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기술 주권을 명분으로 국가가 모든 요소를 국내 기준에 맞춰 통제하려 할 경우, 과거 액티브X나 공인인증서 사례처럼 글로벌 기술 흐름에서 고립된 ‘AI 갈라파고스’로 귀결될 수 있다는 경고다.
이에 대해 보고서가 제시하는 해법은 이분법의 거부다. ‘찬성’이냐 ‘반대’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디까지를 국가가 책임지고 통제할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구분하라는 것이다. 행정·안보·공공 데이터와 핵심 인프라처럼 국가 책임이 불가피한 영역과, GPU 확보나 민간 활용 LLM처럼 글로벌 협력을 적극 활용할 수 있는 영역을 구분해 설계하는 ‘자립과 연계’ 전략이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소버린 AI는 모든 것을 직접 만들겠다는 선언이 아니라, 통제와 책임의 범위를 어디에 설정할 것인가에 대한 전략적 선택이라는 해석이다.
보고서는 이러한 섬세한 ‘경계 설정’의 중요성이 최근 논란이 된 국가대표 AI 모델 구상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고 지적한다. 외부 기술과 코드에 대한 의존 수준을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지, 국가가 필요로 하는 AI의 범위는 무엇인지, 모델의 규모는 어떻게 설계할 것인지, 성능 평가와 책임 기준은 누가 어떻게 정할 것인지 등 핵심 쟁점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선행되지 않는다면, 유사한 정책 논쟁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범용이냐 특화냐… 특화 AI로 산업을 움직이고, 그 성과를 범용 역량으로 잇는 전략 필요
범용 AI와 특화 AI를 둘러싼 논쟁은 단순한 기술 선호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산업과 국가 전략의 방향을 가르는 선택의 문제다. 보고서는 산업 AI의 방향을 둘러싼 이 갈등을 명료하게 대비시킨다. 여러 버티컬을 하나의 플랫폼으로 흡수하려는 범용 AI와, 현장에서 가치를 증명해 온 특화 AI 사이의 긴장이다.
범용 AI를 지지하는 쪽은 모든 버티컬 모델이 궁극적으로 거대 언어 모델로 통합될 수밖에 없다고 본다. 과거에는 이미지 생성, 비디오 생성, 음악 작곡 등 기능별 모델이 병렬적으로 발전해 왔지만, 최근에는 이러한 기능들이 하나의 LLM으로 빠르게 수렴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기존 언어 모델에 로보틱스 역량을 결합한 ‘제미나이 로보틱스’는 물리 세계와의 상호작용마저 범용 지능의 영역으로 편입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꼽힌다.
특화 AI 측의 논리 역시 분명하다. 의료·금융·제조·자율주행·국방 등 다양한 분야에서 발전해 온 특화 AI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지능’이 아니라 ‘반드시 맞아야 하는 문제를 틀리지 않는 지능’으로 진화해 왔다는 것이다. 성과는 화려하지 않을 수 있으나, 현장에서 검증 가능한 결과로 축적되고 있다는 주장이다. 실제 시장도 이를 가치로 평가하고 있다. 국가 안보와 전략 분석에 특화된 AI 기업 팔란티어는 빠른 성장과 함께 시장의 주목을 받고 있다. 전통 제조 기업들도 움직이고 있다. 에머슨과 슈나이더 일렉트릭은 아스펜텍, 아비바 등 산업 소프트웨어 기업을 시가총액의 약 15~20%에 달하는 금액으로 인수하며 산업 특화 AI 역량을 강화하고 있다.
물론 특화 AI만으로는 일정 단계 이후 구조적 한계에 부딪힐 수 있다는 반론도 제기된다. 공정 간 일반화, 환경 변화에 대한 적응, 복합적 의사결정이 요구되는 단계로 갈수록 범용 AI의 역할이 커질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제조 AI의 승부처는 ‘데이터 연합’… 공유가 아니라 결합의 규칙과 책임을 설계하는 국가 과제
보고서는 이러한 구조적 긴장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영역으로 제조를 지목한다. 제조는 단일 산업을 넘어 수출·고용·기술·공급망과 직결된 영역이며, AI 전략의 선택이 산업 내부를 넘어 국가 경쟁력 전반으로 파급되는 핵심 경로이기 때문이다.
범용과 특화 두 진영의 갈등에 대해 보고서는 해법은 ‘선택’이 아니라 ‘연결’이라고 진단한다. 특화 AI로 즉각적인 성과를 만들어내고, 그 성과가 범용 AI로 이어질 수 있도록 경로를 설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단기적 성과와 장기적 역량을 분리하지 말고, 하나의 전략적 흐름으로 엮어야 한다는 판단이다.
이를 위해 보고서는 범용 제조 AI를 본격적으로 추진하려면 개별 기업에 흩어진 제조 데이터의 파편화를 넘어서는 제도적 ‘공적 통로’ 구축이 선결 과제라고 지적한다. 다만 이러한 협업은 기술만으로 자연 발생하지 않는 만큼, 공적 인프라 구축과 데이터 거버넌스, 비용과 책임 분담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전제돼야 한다. 이 과정에서 국가의 조정자 역할은 불가피하다는 점도 분명히 한다.
한 걸음 더 들어가면 ‘암묵지(현장 노하우)’의 문제가 등장한다. 보고서는 암묵지의 축적을 개별 기업의 기술 역량이나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합의와 제도 설계의 문제로 규정한다. 현장의 지식은 단순히 “제공하라”고 요구한다고 모일 수 있는 성질의 데이터가 아니라는 것이다. 국가는 수집의 주체가 아니라 공론장을 조성하고, 감시·평가 목적의 데이터 활용을 명확히 금지하는 한편, 노동자의 권리와 안전이 침해되지 않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판단이다. 불이익에 대한 우려 없이 지식과 경험이 축적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 그것이 범용 제조 AI가 현실에서 출발할 수 있는 최소 조건이라는 지적이다.
특히, 한국에 대해서는 ‘제조 파운데이션 모델’이라는 전략적 기회를 강조한다. 언어 중심의 LLM 질서가 소수 글로벌 기업에 의해 빠르게 고착화되는 것과 달리, 제조·물리 기반 파운데이션 모델은 아직 표준과 기술 경로가 확정되지 않은 미개척 영역이라는 평가다. 세계 최고 수준의 제조 역량과 공정 데이터를 동시에 축적한 국가는 드물다는 점에서, 한국은 단순한 추격자가 아니라 전략적 선도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위치에 서 있다는 것이다.
결론은 ‘인재’… “숫자가 아니라 역할”, ‘데려오기’보다 ‘머물게 하는 구조’
보고서는 AI 전략의 마지막 승부처로 인재를 지목한다. 소버린이냐 글로벌이냐, 범용이냐 특화냐의 선택은 기술 전략처럼 보이지만, “실행 가능성을 가르는 요인은 결국 인재”라는 것이다. AI 경쟁의 본질 역시 기술 자체가 아니라, 이를 구현하고 확장할 인재를 얼마나 확보하고 유지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진단이다.
이에 따라 보고서는 ‘AI 인재 10만 양성’과 같은 숫자 중심 목표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한다. 중요한 것은 양이 아니라 역할이다. 어떤 기능과 책임을 수행할 인재가 필요한지를 먼저 정의하고, 다양한 역할의 인재가 축적·성장할 수 있는 생태계로 정책의 초점을 옮겨야 한다는 주장이다. 해외 인재 영입만으로는 한계가 분명한 만큼, 미션과 연구·산업 인프라를 제공해 국내 인재가 성장하고 활동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AI 인재 유출을 둘러싼 보상 문제 역시 외면할 수 없다. 실제로 AI 인재가 직업을 선택할 때 연봉은 여전히 가장 중요한 변수다. 다만 AI 시대의 경력 구조는 이미 달라지고 있다. 하나의 직장을 오래 유지하는 경력보다, 하나의 직업을 여러 국면에서 확장해 나가는 이동형·프로젝트형 경력이 보편화되고 있다. 종신 고용을 전제로 낮은 임금에서 출발하는 연봉 체계는 기업에는 장기 보상 리스크를 키우고, 인재에게는 성장과 이동의 기회를 차단한다. 인재와 기업 모두에게 비효율적인 구조라는 평가다.
보고서는 해법을 ‘연봉 인상 경쟁’에서 찾지 않는다. 핵심은 보상의 크기가 아니라, 보상을 조정할 수 있는 유연성을 회복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성과와 책임에 기반한 계약형 고용, 고연봉·고위험 구조, 스톡옵션 등 다양한 보상 모델을 제도적으로 검토하고 확산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한다. 고용 안정성을 유지하되 기여에 따라 보상이 명확히 달라지는 방식, 이른바 ‘엔비디아식 보상 모델’도 현실적인 대안으로 거론된다.
‘AI 주권’ 논쟁이 놓치기 쉬운 한 가지… “국가가 먼저 ‘최초 수요자’가 돼야 한다”
보고서가 반복해서 경계하는 것은 ‘선언’의 정치다. ‘국산 LLM 만들었다’는 선언, ‘글로벌에 올라타자’는 선언은 쉽다. 그러나 산업이 움직이게 만드는 것은 지속 가능한 비즈니스 모델과 수요다. 이 맥락에서 보고서는 정부가 AI 바우처 등으로 시장 리스크를 분담하는 것뿐 아니라, 공공 부문이 행정 자동화·국방 시뮬레이션 등에서 적극적 사용자로 참여하는 ‘최초 수요자(First Buyer)’ 역할까지 검토해야 한다고 제시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