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욱 산 이야기】 산에서 배우는 인생 ⑩ - 고봉산

2020.11.19 10:09:29

 

[ 시사뉴스 오병욱 칼럼니스트 ]  오늘은 고봉산이다. 오늘 오후의 가족 행사로 친구들과의 산행에 빠지게 되어 가까운 고봉산 산행으로 대체하려고 아침 일찍 중산동행 버스를 탔다. 고양시 일대에서는 고봉산이 제일 높아 예부터 그 일대가 한뫼 마을로 불리던 곳이 일제 강점기에 일산으로 개명되어 지금은 구 일산이 되고, 한강 변에는 일산 신도시가 생겼다. 


일산 신도시 이후, 고봉산 자락에는 중산지구와 탄현지구가 개발되며 고봉산이 아파트로 둘러싸이게 됐다. 
안곡초등학교 앞에서 버스를 내려 안곡 습지 공원을 들렀다. 고봉산 기슭의 안곡 습지는 아파트 단지 개발에 밀려 사라질 위기에 처했으나, 일산 주민들의 노력으로 습지 공원으로 지정되어 개구리와 습지 생물들이 잘 자란다고 하며 습지도 잘 보존되고 있다. 


습지에는 아침의 뿌연 안개가 살포시 피어오르고 있고, 억새 숲 사이에는 이른 아침 새들의 지저귐으로 정겨웠다. 
습지를 지나 고봉산으로 오르는 산길을 간다. 산길은 작은 오솔길로 나무들이 잎을 떨어내며 나목으로 변해가고 있다. 나무가 나목으로 있는 시절은 또 얼마나 혹독한 겨울을 맞이하는 걸까. 나목은 흡사 스님이 동안거에 들어가는 비장함이 서린다. 


지허 스님의 ‘선방일기(禪房日記)’에 의하면, “선(禪)은 인위적인 일체의 잡다한 형식을 무시하고 관계를 단절하며 심지어는 불경까지를 외면한 채 오직 화두에 의한 선리참구(禪理參究)만을 목적으로 한다”지 않는가. 한해를 마감하는 길목에서, 나 또한 나목의 마음으로 무엇을 화두로 인생의 의미를 참구(參究)해야 하나. 안곡 습지의 안내판에는, 오르는 길옆에 장희빈 친정 묘역이 있다고 해 산길을 이리저리 헤매다가 겨우 찾았다. 


아래는 커다란 신도비가 있고, 신도비 위로 눈에 보이는 묘역 위에 곡장을 두른 당당한 무덤이 옥산 부원군 장형의 무덤이다. 한옆으로는 장희빈의 위세로 한 시대를 주름잡던 장희재의 무덤도 있다. 장희재는 제주에서 부관참시를 당해 시신이 없는 묘라 한다. 


이 묘역은 은평구에 있던 것을 1974년에 이곳으로 이장했다 한다. 
숙종 시대의 노론과 남인의 정치 파동이 얼마나 격동적이었는지는 장희빈의 생애가 잘 알려주고 있듯이, 숙종 재위 46년 동안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신권 세력과의 권력 투쟁에 몰두했다. 숙종이 즉위할 당시,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서인 세력은 군왕보다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어, 어린 나이에 보위에 오른 숙종이 김석주를 비롯한 척신 세력에 의지하여 내내 환국 정치로 몰아넣었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숙종의 역사는 신하와의 권력 싸움으로만 보여 아쉽다.


어딜 가던 역사를 안고 있는 산은 그래서 인문학의 향기도 있는 듯하여 더욱 애착이 간다. 
고양시는 특히 역사적 인물들이 많은데, 이는 당시 ‘성저십리(城底十里)’는 한성판윤이 관장하는 지역으로, 한양 10리 안에는 묘를 쓸 수가 없었기에, 10리 밖의 고양시 쪽에 특히 묘역이 많다고 한다. 묘역을 지나 정상을 향하니 정상은 출입 통제 구역이다. 군부대에 수용당한 정상은 커다란 철탑이 우뚝 솟아있어, 그 옆의 산길을 돌아 ‘영천사’로 향한다. 


‘영천사’의 작은 절 앞마당에는 스님이 나와 인사를 하고, 벼랑 밑 담장에는 늦가을 장미가 피어나 있다. 아침부터 오르는 주민들과의 인사가 일상의 일인 듯, 산 능선의 절 풍경은 또 그렇게 가을을 드리우고 있다. 


내려오는 숲길은 솔밭이다. 우리나라 숲이 예전에는 7할 이상이 소나무였다던데, 김훈 선생의 ‘흑산’이란 소설을 보면 조선 시대에는 고을 수령들이 마을 주민들에게 소나무 관리를 시키고 세금도 부과하여, 수탈에 찌든 주민들이 작은 소나무 묘목이 올라오면 몰래 뽑아버렸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나라에서는 소나무를 귀하게 여겼던 것 같다. 


고도 202m의 큰 산이건만, 정상을 못 오르고 내려오니 짧았다. 안내판에는 그래도 고봉산 숲길을 따라 약 2시간의 산책을 즐길 수 있다고 한다. 고봉산 삼거리에 내려오니 길가에 금정굴 위령제의 현수막이 걸려 있다. 
10월 15일에 있었다던 위령제. 고봉산 삼거리의 앞산인 황룡 산을 잠깐 오르니 금정굴 안내판이 나오고 천막이 보인다. 천막 안으로 굴 입구가 철제문으로 막혀있다.


간단히 정리하면, 금정굴 사건은 1950년 10월 9일부터 약 20일간 고양경찰서의 지휘 아래 경찰과 우익단체 회원들이 200여 명의 북한군 부역 혐의자와 그 가족 등을 재판 없이 집단 살해한 뒤, 폐광인 금정굴에 매장한 사건을 말한다. 


그 가족들은 빨갱이라는 누명 속에 40여 년을 숨죽이며 살다가 이제 서야 공론화를 시작한 이념 전쟁의 상처다. 그 아픈 기록들이 금정굴 앞 안내판에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40여 년을 조용히 있다가 왜 이제야 나서냐고 하면 안 된다. 그 사람들은 그만큼 시린 세월을 살고 이제야 용기를 낼 만큼 아직 몸과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다. 그만큼 우리가 살아온 세월이 혹독했다.


소설가 김훈 선생은 그의 ‘라면을 끓이며’라는 수필에서 “생명과 죽음은 추상의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회복 불가능하고 대체 불가능한 일회적 존재의 영원한 소멸이다. 그래서 한 개인의 횡사는 세계 전체의 무너짐과 맞먹는 것이고, 이 개별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체제가 전체주의다.”라며 개별성을 강조했다. 


그 세계 전체의 무너짐과 맞먹는 개인적 죽음이 어찌 일반적 죽음으로 뭉뚱그려 이념의 죽음으로 묶어버릴 수 있는가.


일본 동경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하는 강상중 교수의 ‘떠오른 국가와 버려진 국민’이란 책에는 “역사는 승리의 전유물이 아니다. 이름 없이 사라진 사람들, 자신의 처지를 저주하면서 죽은 사람들을 복원해야 한다. 역사의 묘지에 버려진 사람들을 되살려 이어  붙일 때,  비로소 내 부모가 살아간 역사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라며 국가의 폭력성을 강력히 비판하고 있다. 국가라는 이름의 이념 폭력이 횡행하던 시절이 있었다.


요즘 세대에는 예전에 걸리지 않던 자가 면역성 질병, 즉 아토피, 알러지, 류마치스성 관절염, 크론병 등등, 이 많다고 한다. 이는 세균에 대한 위생이 너무 철저해, 면역의 지나친 활성화로 자기 세포를 공격하여 일어난다고 한다. 나쁘다고 생각했던 세균 중에 병을 일으키는 세균은 아주 일부라 한다. 


우리 몸도 ‘면역 관용’이 있어 세균과 타협한다는데, 이념도 적당한 선에서의 ‘관용’을 보여줄 수는 없는가. 이념의 상처에 침묵하는 세상에도, 금정굴의 숲에는 햇살이 빛나고 산새는 지저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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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병욱 칼럼니스트 oh00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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