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 송경호 기자] 그룹 '원더걸스'의 대표 댄스곡인 '텔미'가 흘러나온다. 멤버들은 그런데 춤을 추지 않는다. 대신 각자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유빈의 드럼이 묵직하게 자리한 가운데 선미의 베이스가 리듬을 맞추고 혜림의 기타가 그르렁거리며 예은의 키보드가 멜로디를 덧댔다.
원더걸스가 3년2개월 만인 3일 오후 서울 이태원 현대카드 뮤직 라이브러리 + 언더스테이지에서 정규 3집 '리부트(REBOOT)' 쇼케이스를 열고 밴드로 화려하게 컴백했다. 본래 원더걸스는 2000년대 후반을 풍미한 대표적인 댄스 걸그룹이다.
이날 정오 공개돼 음원사이트의 실시간차트 정상을 휩쓴 '아이 필 유(I Feel You)'를 연주할 때가 화룡점정이었다. 원더걸스 소속사인 JYP엔터테인먼트의 프로듀서 박진영이 작사 작곡한 곡으로 80년대 복고풍의 그루브한 리듬이 인상적이다. 신시 악기들과 싱코페이션(당김음) 기반의 화려한 리듬을 결합시킨 프리스타일 장르다.
네 멤버들은 살짝 댄스를 선보이기도 했지만 악기 연주가 주축인, 새로운 유형의 매혹적인 걸그룹 무대를 꾸몄다.
예은은 이날 쇼케이스 뒤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밴드로서 공연하는 건 정말 처음이라서 긴장을 많이 했다"며 활짝 웃었다.
"밴드로 나오기 전 고민이 많았죠. 저희가 사랑받았던 이유는 춤과 노래였는데 그걸 버린다니 걱정이 됐어요. 그런데 막상 곡이 나오고 밴드 연주를 하고 거기에 살짝 춤을 더하니 더 괜찮을 수 있을 것 같아 한 시름 놓았죠."
밴드로 변신하게 된 계기에 대해 "쉬는 동안 멤버들이 취미로 악기를 배우기 시작한 것이 계기"라고 예은이 전했다. "유빈은 래퍼라 드럼을 배우고 싶어했고 혜림은 컨트리 음악을 좋아해서 어쿠스틱 기타를 시작했죠. 저는 원래 건반을 쳤고요. 선미 양은 다른 멤버들이 다 악기를 하니 자신도 하고싶다며 베이스를 치기 시작한 것이 시초가 아니었나 해요. 그러다가 멤버들끼리 합주를 하게 됐고 '그 노래 할 줄 알아'하면서 연주를 하게 됐죠. 특히 저희 곡 중에 '걸프렌드'를 재미 삼아 연주하고 있는데 회사 분들이 보시고 대중분들에게도 보여주는 것이 좋겠다고 하셔서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했죠."
앨범 타이틀인 '리부트'(reboot)가 눈길을 끈다. 컴퓨터를 재시동하는 것과 같이 어떤 작품이나 팀의 연속성을 버리고 주요 골격이나 등장인물만 가져온 새로운 시리즈를 일컫는 것으로 팀의 형태를 바꾼 원더걸스에게도 오롯이 가닿는다.
"(2010년 학업을 이유로 팀에서 나갔다 이번에 합류한) 선미도 돌아오고 해서 앨범명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죠. 악기를 연주하고 합주를 하고 음악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에서 멤버들이 더 적극적으로 참여했어요. '아이 필 유'를 제외한 곡들(앨범에 총 12곡이 실렸다)을 공동 작업했는데 이 앨범이 저희에게 완전한 새로운 시작이 되지 않을까 싶었죠."(예은)
공개 직후 '아이 필 유'가 1위를 한 것에 대해 선미는 "솔직히 기대는 별로 안했어요. 내려놓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래서 얼떨떨해요"라고 머리를 긁적였다. "팬들이 아직까지 저희를 잊지 않고 찾아준다는 것에 참 감사하죠"라고 덧붙였다.
멤버들은 합주가 가장 어려웠다고 입을 모았다. 예은은 "네 멤버 모두 합주를 하다가 한번씩은 뛰어나갔어요. 연주가 빨라지기도 하고 느려지기도 하니까 쉽지가 않더라"라며 "네명 중 한명이라도 없으면 연습 진행도 어려웠죠. 서로 잘하고 있다고 북돋아주며 여기까지 온 것 같아요"라고 알렸다.
선미도 "연주를 하다가 매번 벽에 부딪히는 느낌이 들었다"면서 "처음에 열심히 하면 실력이 느는데 정체가 되는 순간이 오더라고요. 그 순간이 올 때 힘들었어요. 연습실을 박차고 뛰어나가 울기도 하고요"라고 웃었다.
최근 '소녀시대' '빅뱅' 등 인기 그룹들이 비슷한 시기에 컴백하게 됐지만 원더걸스 멤버들은 부담스럽다기 보다 "다행"이라고 입을 모으며 즐거워했다. 예은은 "이제 음악방송에 가면 고참이 돼 후배밖에 없는데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빅뱅, 소녀시대와 함께 활동하게 돼 너무 반갑다"고 눈을 반짝였다.
2007년 2월 싱글 '아이러니'로 데뷔한 원더걸스는 같은 해 원년 멤버 현아(현 그룹 '포미닛')가 빠지고 유빈이 합류한 뒤 그해 9월 정규 1집 '텔 미'로 인기를 얻었다.
한국에서의 인기를 발판으로 2009년 미국 진출을 선언한 원더걸스는 같은 해 한국 가수 중 처음으로 빌보드 싱글차트 '핫100'에서 76위에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이후 세계적인 금융 위기 등으로 현지 활동이 원활하지 못했고, 국내 공백기가 생기면서 예전의 명성이 조금씩 퇴색됐다. 2010년 선미가 학업 등을 이유로 탈퇴하고 혜림이 합류했지만 과거의 인기는 되찾지 못했다.
당시 절정의 인기를 던지고 미국 진출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있을 수 있다. "정말 후회가 없다고 해도 많은 분들이 믿지 않으세요. 말만 그렇게 하는거 아니냐고 하시는데요. 정말 소중한 시간이었어요. 버스 안에서 깻잎이랑 김이랑 밥먹고 라면 끓여먹었던 것도 좋은 추억이고(웃음). 특히 미국에서 시간은 저희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하고 싶어하는지 고민하는 계기가 됐어요. 그때는 어려서 도전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없었죠. 그래서 지금 밴드에 도전하는 것도 두려움이 없었다고 생각해요."
2013년 결혼 이후 출산 등에 집중한 리더 선미와 연기 활동 전념을 이후로 2013년 말 BH엔터테인먼트로 이적한 소희는 지난달 팀에서 공식적으로 빠졌다.
그럼에도 이번 앨범에 대해 응원해줬다고 알렸다. 예은은 "선예와 소희가 오늘도 연락을 했어요. 자기들이 더 떨린다면서 잘하라고 응원해줬죠. 항상 연락을 주고 받았어요"라고 전했다.
앞서 노출이 다소 많은 바디 수트 형식의 수영복 티저가 화제가 되기도 했다. 예은은 "저희가 미국을 다녀온 뒤 개방적으로 변한 것인 줄은 몰라도 야하다고 생각하실 줄은 몰랐다"면서 "더운 여름이고 악기를 연주해야 하니까 깔끔한 바디수트 스타일이 좋다고 생각했는데 많은 분들이 놀라신 것 같아요. 앞으로 그 의상으로 무대에 서지는 않을 것 같아요"라고 전했다.
공백 기간 동안 수차례 해체설에 휩싸이기도 했다. 유빈은 "지금도 숙소에서 4명이 함께 살아요. 다른 멤버들과도 계속 연락하고 지내니 그런 이야기(해체설)을 체감하지 못했죠"라고 전했다.
원더걸스는 데뷔 때부터 1970~80년대 복고 음악의 대명사였다. 이번 앨범 역시 자신들 색깔의 자장을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밴드라는 새로운 형식으로 신선함을 안기는 묘수를 뒀다.
선미는 "저희가 그 시대를 산 애들이 아니고 그 시대의 음악을 듣고 자란 세대도 아니지만 저희가 듣기에도 그 시대 사운드는 정말 새롭다"면서 "그 감성을 우리만의 색으로 해석해서 표현하는 것이 신선한 느낌을 준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했다.
예은은 "많은 분들이 생각하는 밴드의 모습보다는 원더걸스가 할 수 있는 '레트로(복고) 팝'을 연주하면서 또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멤버들은 80년대를 풍미한 뮤지션들의 이름을 술술 댔다. 예은은 "여기가 2015년인지 1987년인지 모를 정도로 눈 뜨면 계속 들었다"고 웃었다. 밴드와 복고 음악에 대한 관심이 마냥 콘셉트이거나 허투루가 아니라는 반증이다. 우선 프리스타일 장르에서는 엑스포제, 커버걸스, 더 제트, 주디 토레스 같은 팀의 이름이 나왔다. 프리스타일 장르가 아니더라도 80년대를 풍미한 걸밴드인 '뱅글스' 등을 들었다고 했다.
이번 앨범이 성장하는 발판이 됐다. "대중이 원래 저희를 좋아하신 모습은 귀에 감기는 음악에 안무를 하는 것이었잖아요. 그 포맷에서 아예 벗어나서 밴드를 준비하게 됐을 때 두려움이 아무래도 컸죠. 그런 두려움이 그나마 사라지게 된 계기는 처음으로 앨범의 전곡에 자기 이야기와 자기 감성을 풀어냈는데 그 과정이 만족스러웠기 때문이에요. 개개인이 성장한 느낌이 들더라고요. 이제 대중들이 조금 낯설어하신다고 해도 후회는 없어요. 이 밴드란 포맷이 일회성은 아닐 겁니다."(선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