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테랑' 류승완 감독 "영화는 여행, 늘 새로운 곳을 찾는다"

2015.07.26 10:35:14

[시사뉴스 조종림 기자] '베테랑'은 여름과 잘 어울리는 영화다. 경쾌하고, 에너지 넘치는 작품이다. 관객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결과를 향해 그저 이야기에 몸을 싣고, 배우들과 함께 힘차게 달리면 된다. 죄를 지은 재벌 3세가 있고, 그를 잡으려는 형사가 있다. 그리고 형사는 재벌을 잡는 데 성공한다. 요즘 말로 말하면 '베테랑'은 '사이다'다.

'액션 키드'라는 별명의 분위기로 보면 류승완(42) 감독은 언제나 밝고 경쾌한 영화를 만드는 연출가라는 이미지가 있다. 하지만 그는 막상 밝은 영화를 그리 자주 만들지 않았다. '베테랑'을 포함해 그가 만든 9편의 장편영화 중 '다찌마와 리'(2008) '짝패'(2006) '아라한 장풍 대작전' 정도만 밝은 영화였다. 특히 '부당거래'(2010) '베를린'(2013)으로 이어지는 그의 필모그래피는 어느 때보다 어두웠다.

그랬던 그가 그 어떤 영화보다 밝고 활기찬 영화로 돌아왔다. 그에게 어떤 변화가 생긴 것일까.

-언론 시사회 후 반응이 만장일치에 가깝게 좋았다.

"감사할 뿐이다. 좋은 일이고. 하지만 뚜껑을 열어봐야 알지 않겠나."

-영화에 기자의 회사 건물이 나오더라. 반가웠다.(웃음)

"아, 극동빌딩!"

-지금은 남산스퀘어다.

"내게는 그 동네가 익숙한 곳이다. 연출부 막내 생활할 때 충무로를 돌아다니면서 그 건물을 봤으니까. 그 건물 지하에 있는 다방이나 근처 다방에서 영화인들이 많이 모였다. 추억이 있는 장소다."

-그 건물을 '신진물산'의 본사로 설정한 이유는 단지 익숙해서인가.

"(웃음)아니다. 영화가 가진 사실감 확보 측면에서 신진물산이라는 회사가 강북에 본사가 있는 회사여야 했다. 신진물산은 신흥 재벌이 아니다. 삼대(三代)에 걸쳐 부가 대물림된 재벌가다. 연출부에게 강북에서 그런 느낌을 줄 수 있는 건물을 찾으라고 했다. 우연히 내가 아는 동네, 내가 아는 건물에서 촬영하게 됐다. 기분이 좋았다."

-영화가 경쾌하고 신나더라. 재밌는 건 영화의 그런 공기가 단순히 연출 방식에서 느껴진다기보다는 배우들이 정말 즐겁게 연기하고 스태프가 정말 즐겁게 촬영하고 있다는 게 느껴져서인 것 같았다.

"맞는 말이다. 정말 즐겁게 촬영했다. 특히 황정민 선배를 중심으로 배우들과 스태프의 호흡이 좋았다. 물론 영화라는 게 기본적으로 스트레스가 있는 작업이다. 하지만 이번 현장은 그런 스트레스를 우리가 충분히 통제할 수 있었다. 특히 광수대 팀(황정민, 오달수, 오대환, 장윤주 등) 촬영은 매번 마치 소풍 가는 분위기였다."

-조태오 라인은 아니었나 보다.(웃음)

"아니다. 그쪽도 물론 분위기 좋았다. 하지만 조금 차이가 있다. 악행을 저지르는 쪽이 아닌가. 그런 면에서 묘한 긴장감이 있다. 특히 조태오가 화물기사에게 격투기를 시키는 장면 같은 경우에는 폭력적인 장면인 데다가 그 신(scene)에 아이도 있어서 조심스럽게 촬영했다."

-촬영 분위기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 이유가 있다. 기자가 대학생 때 우연히 당신의 촬영 현장을 본 적이 있었다. 분위기가 살벌하더라. 그때 당신은 뭐가 그렇게 화가 났는지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굉장히 화가 나 있었다. 그때 '영화감독들은 다 저런가' 이런 생각도 했다.(웃음)

"(폭소)그게 아마 광고촬영이었을 거다. 기억난다. 이제는 안 그런다."

-"이제는 안 그런다"는 건 무슨 의미인가.

"그때는 내가 삼십대였다. 정말 에너지가 넘치던 시기였다. 아시겠지만 '부당거래'의 '조양'(류승범)의 일하는 모습이 딱 내 모습이다.(웃음) 이제 나도 사십대다. 나이를 먹는 거지.(웃음)"

-현장을 이끌어가는 방식 혹은 연출 방식에 변화가 생겼다는 말로 들린다.

"그렇다. 변한 것 같다. 예전에는 내가 모든 것을 다 하려고 했다. 하나 하나 다 내가 통제해야 직성이 풀렸다. 음…내가 모든 걸 '메이킹'하려고 했다 해야 하나. 하지만 이제는 '초이스'하는 쪽으로 간다."

-구체적으로 말해 달라.

"우리가 '디렉션'이라고 말하는 게 어떤 방향성을 알려준다는 것 아닌가. 내가 스태프와 배우에게 어떤 방향을 던지면, 그 분야의 전문가들, 프로들이 모여 다시 내게 제안한다. 그럼 난 그중에 하나를 고르면 되는 것이다. 내가 에너지를 막 뿜어내지 않아도 되고, 효율적이다. 그렇게 하니까 좁아졌던 시야가 넓어지는 것 같다."

-'베테랑'에서 예를 든다면 어떤 게 있나.

"'조태오'라는 캐릭터가 그렇다. 물론 시나리오에 이 인물에 대한 정보는 다 들어있다. 이 사람이 치는 대사라든가 하는 행동이라든가. 하지만 유아인이라는 배우가 그런 식으로 조태오에 접근할 줄은 몰랐다. 그런 식으로 나른하고 미소년처럼 웃고. 예전에 나는 어떤 캐릭터가 있으면 배우를 납치해온 뒤에 '넌 여기서만 행복하게 살아!'라는 주의였다.(웃음) 이제는 맡긴다. 배우가 캐릭터라는 옷에 맞게 살도 찌워보고 다이어트도 해보고 그런 과정에서 제일 맞는 몸 상태를 만든다. 난 그걸 보고 맘에 안 들면 다시 해보라고 하고. 맘에 들면 오케이 한다."

-이런 변화가 영화 작업에 관한 당신의 태도까지 바꿔놓았나.

"이 영화('베테랑')가 특별한 게 그런 거다. 영화 만드는 즐거움을 다시 가져다줬다. '아, 이렇게 날로 먹는 방법이 있구나'하는 것이다.(웃음) 우리 영화가 관객이 보기에 좋은 점이 있다면 그건 온전히 내가 그렇게 만들 수 있게끔 해준 배우와 스태프의 공이다. 이건 그냥 겸손의 표시가 아니다. 난 그들에게 신세를 많이 졌다. 물론 촬영 끝났으니 이제 갚을 필요는 없다.(웃음) 아무튼 그런 거다. 그래서 엔딩 크레딧에서 내 이름보다 배우들의 이름이 먼저 나온다."

-그렇다면 이런 변화가 온 이유가 궁금하다. 아까 잠깐 언급됐듯이 나이 때문인가. 아니면 경력이 쌓여서인가.

"둘 다라고 본다. 힘들 때 임권택 감독님 인터뷰집을 본다. 정성일 선생과 임권택 감독님이 꽤 오랫동안 대담을 했는데, 그걸 묶은 인터뷰집이다. 정성일 선생이 임권택 감독을 만날 때마다 맨 처음 묻는 게 있다. '당신에게 영화란 무엇입니까.' 대답이 매번 다른데, 최근에 임 감독님이 하신 말씀이 '영화는 나이를 찍는 것 같다'였다. 내가 임 감독님의 그 말씀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건 아니다. 막연하게 느끼는 거다. 난 이 세상의 모든 것, 사람을 포함해서 모든 것은 변한다고 본다. 외형적으로 그렇고, 인간 내부도 그렇다. 변할 거면 잘 변해야 한다. 그리고 그 변화가 퇴보가 아닌 성장이었으면 한다."

-조금 추상적인 대답이다.

"왜 변했냐고? 그건 모르는 거다. 정확히 짚을 수 없다. 난 갑자기 변하지 않았다. 영화는 몇 년에 한 편 나오니까 그렇게 느껴지는 거지. 그 사이에 시간이 있지 않나."

-'부당거래', '베를린'으로 이어질 때 당신의 영화가 점점 어둡고 진지해지는 쪽으로 변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런데 '베테랑'에서 갑자기 확 밝아진 느낌이다. '베를린'을 찍고 무슨 일이 있었나 싶은 거다.

"내가 영화 하면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가장 힘들었던 게 '베를린' 할 때가 아니었나 싶다. 유럽에서의 촬영, 큰 제작비 이런 것들도 쉽지 않았지만, 그 영화 속 사람들이 너무 처연했다. 그런 연민의 감정들."

-조금 부족한 대답이다.(웃음)

"내가 그때 몸무게가 54㎏까지 빠졌다. 기억하겠지만, '베를린'이 표절 시비에 휘말린 적이 있었다. 소설 '차일드 44'를 표절했다고. 정말 미치겠더라.(류승완 감독은 표절이 아닌 이유에 관해서 황석영 작가의 소설 '무기의 그늘'과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의 '전쟁의 사상자들'을 예로 들어 설명했다) 정말 스트레스가 극심했다. 그때 황정민 선배가 '대체 영화가 뭔데 이러고 있냐'고 그러더라. '다 먹고 살려고 하는 건데 왜 사람이 몸이 망가져서 이러고 있냐'고. '다음 작품 무조건 내가 같이할 테니까, 놀면서 하자'고."

-그래서 탄생한 게 '베테랑'이라는 건가.

"그렇다. 멋진 남자들이, 자기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 움직이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 스트레스의 결과가 '베테랑'이라면 나쁘지 않은 것 같다.(웃음) 당신의 이미지는 마치 밝은 영화만 만드는 연출가로 보이는데, 필모그래피를 보면 사실 어두운 영화도 많다. '주먹이 운다'나 '부당거래' 같은 건 참 우울하다. 반대로 '베테랑'은 정말 밝고.

"나의 인생, 나의 필모그래피라는 큰 그림을 그리면서 영화를 만들지는 않는다. 어릴 때는 그랬지.(웃음) 누구나 그렇지만 내 안에는 어두운 면과 밝은 면이 공존하는 것 같다. 그때그때의 감정에 충실하게 영화를 만든다. 예를 들면, '부당거래'를 만들 때는 내 안의 분노가 극에 달했을 때다. 그래서 그런 영화가 나왔다. 내가 얼마나 대단한 영화를 만들겠다고 내 감정을 속여가면서 살고 싶지는 않다. '베테랑'을 만들 때는 내가 그냥 그렇게 만들고 싶었을 뿐이다. 과거의 나, 현재의 나, 미래의 나는 항상 다를 것이다."

-조금 추상적인 질문이다. 당신에게 영화를 만드는 건 어떤 건가.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의 '아메리카의 밤'을 보면 오프닝에 이런 내레이션이 나온다. '영화 만드는 것은 역마차 여행과 같다고 한다. 출발할 때는 언제나 들뜬 마음으로 출발해서 중간에는 제발 이 여행이 끝나기만을 바라고, 여행이 끝나면 또 다른 여행을 떠나고 싶어한다. 이것이 영화와 여행의 공통점이다.' 내 생각도 그렇다. 영화 만들기의 재미는 제가 가진 인생에서 받은 가장 큰 복이다. 그것은 다양한 인생의 여행지에 갈 수 있다는 거다. 같은 여행지를 반복해서 가려는 사람은 잘 없지 않나. 나도 그렇다. 저번에 밝은 여행지를 갔다면, 이번에는 어두운 여행지를 가고 싶고. 그런 것 같다."

-'베테랑'에 관한 이야기를 너무 안 했다.(웃음) 극 중 '쪽팔리게 살지 말자'라는 대사 인상적이었다. 당신이 주진우 기자와 친하다고 알고 있다. 이 대사가 그분이 자주 하는 말로 알고 있는데, 영향이 있는 건가.

"내가 그렇게 좋아하는 대사는 아니다.(웃음) 주진우 같은 사람이 '서도철'(황정민)을 만드는 데 준 영향이 크긴 하다. 남이 어려운 일을 당하면 당장 달려가고 뭐 그런 것들. 난 주진우가 사무실에 붙어있는 걸 못 봤다. 서도철도 그렇지 않나.(웃음) 난 서도철이 판타지적인 인물이 아니라고 본다. 그런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 덕분에 세상이 돌아간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가 그런 사람들을 응원하는 면도 있다."

-당신이 제일 좋아하는 대사는 뭔가.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어!' 이 대사다. 사실 이 대사는 강수연 선배가 술자리에서 했던 말이다. 영화인들이 모인 술자리였는데, 그 말씀을 하시더라. 어찌나 멋있는지.(웃음) 선배의 그 말을 언젠가 써먹어야지 하고 있었다. '베를린'에도 비슷한 대사가 나온다. '표종성'(하정우)이 '련정희'(전지현)와 밥 먹으면서 그런다. '난 우리가 가난해도 당당하게 살 수 있다고 믿는다.' 난 돈과 행복이 같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너 돈 있어? 난 가오 있어. 너 돈 좀 있다고 왜 나 무시해?' 이런 거다.(웃음) 예를 들면 그런 거다. 우리가 흔히 벤츠한테는 차선 비켜주고, 경차한테는 안 비켜주고 그러지 않나. 난 이건 아니라는 거다.(웃음) 내가 너무 나갔나.(웃음)"

-얘기를 듣다 보니 당신은 당신의 전작을 통해 반성을 꽤 자주 하는 것 같다. 그게 아니더라도 반성을 자주 하는 것 같다.

"맞다. 콤플렉스가 심하다. 나 매일 정기적인 자아비판의 시간을 갖는다.(웃음) '난 왜 이렇게 살까' '난 왜 이렇게밖에 못하나' 이런 생각을 한다. 난 내가 만든 영화에 대한 아쉬움과 갈증이 큰 사람이다. 내가 영화를 만드는 원동력은 나에 대한 불만이다. 더 잘하고 싶고, 극복하고 싶고 그렇다. 난 나를 괴롭히는 변태적 성향이 있다. 머리 감을 때도 머리를 엄청 세게 문지른다든가.(웃음)"

-'베테랑'은 어떤 영화인가.

"이 영화의 판을 깔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이번 영화는 아이들 세대에게 보여줄 수 있는 자신이 있다고. '아저씨가 생각하기에는 세상이 이런데, 그래도 한 번 싸워볼 만 해.' 이런 느낌이랄까. '폴리스 스토리' '리썰 웨폰'처럼 이런 영웅들이 있다. 너희도 한 번 해볼 만하다고. 너희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베테랑'을 관객이 어떻게 보길 원하나.

"다양한 사람이 다양한 시선으로 보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봐라, 저렇게 봐라' 하는 건 의미가 없다. 다만 이런 생각은 한다. 먼 훗날 내가 은퇴하고 오늘 내일하는 상항에서 토막 기사 하나를 본 거다. 용감한 시민, 용감한 경찰에 관한 기사인데, 이 사람이 자신이 어린 시절 '베테랑'이라는 영화를 보고 이런 일을 하게 됐다고 말하는 거다.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할 것이다."


 

조종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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