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전명 ‘여명의 황새울’
2006년 5월4일 작전명 ‘여명의 황새울’. 예로부터 귀한 존재로 여겨졌던 황새가 노니는 곳이라 해서 이름 붙여진 너른 들판에 방패와 철모로 무장한 군인들과 용역업체 직원들이 들이닥쳤다. 새벽부터 울리던 사이렌 소리와 끝이 보이지 않게 이어진 전경버스, 부산하게 뛰어다니던 학생과 노동자들, 그 사이로 연신 셔터를 눌러대던 기자들로 마을은 그야말로 ‘전쟁터’가 됐다. 미군기지 확장에 반대하고 마을을 지키고자 했던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연행됐으며, 투쟁의 중심이던 대추 초등학교는 무너지고 볍씨를 뿌려놓은 논에는 철조망이 둘러쳐졌다.
마치 전쟁과도 같았던 이날 이후, 대추리의 상황은 급속도로 나빠졌다. 마을로 들어가는 길을 차단해 통행을 제한하고, 논으로 들어가는 것 또한 막기 위해 깊은 웅덩이를 파놓아 마을과 주민들을 철저히 고립시킨 것이다. 오랜 세월에 걸쳐 대대손손 가꿔온 논과 밭이 바싹바싹 타들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농민들의 속도 함께 타들어갔고 그 깊은 한숨과 눈물은 김준호 감독의 카메라를 통해 고스란히 전달된다.
농심의 진리
다큐 ‘길’의 주인공은 방효태 할아버지. “목마르잖어. 마셔”하면서 내미는 깡소주 한 병, 손으로 툭툭 쳐서 쪼갠 사과, 주름진 눈가와 웃을 때 드러나는 톡 벌어진 앞니, 평생 농사일로 다져진 몸의 근육들. 일흔이 넘는 몸에서 나온다고 믿을 수 없을 만큼의 체력을 자랑하며 ‘몸으로 사는 생명력’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군사시설보호법에 의해 모든 영농행위를 금지한다는 국방부의 통보 앞에 농민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망연자실 죽어가는 땅을 바라볼 뿐이다. 하지만 “논은 자식보다 소중한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방효태 할아버지는 맨 손으로 단단해진 흙을 파내고 골라 길을 만들기 시작한다. “쫓겨 날 땐 쫓겨나더라도 농사는 지어야지, 그게 농부여…” 그렇게 놓여진 길로 경운기를 끌고 들어가 너른 들판에 농약을 치는 할아버지의 모습은 그 자체로 상당한 울림을 전달한다. 늙은 농부가 한 평생 농사를 지으며 배워온 인생의 깊이는 대추리 주민들의 삶, 그들이 지키려는 가치의 중요성을 설득하는 힘이 되는 것이다.
욕심 부리지 않고 제 자리를 지키면서 사는 평화를 추구하는 방 할아버지의 모습은 자본과 권력의 논리로만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모습과 대비되면서 울림을 준다. 자본의 전쟁터에서 지친 도시인들에게 또한 위안과 깨달음의 메시지를 던진다.
상반되는 이미지 제시
다큐 ‘길’은 이처럼 대립되는 가치와 이미지들을 제시하며 주제를 전달한다. 너른 들판 알알이 곡식이 여물어가야할 자리에 대신 자리를 잡은 철조망과, 기지에서 들려오는 사이렌 소리, 황새가 있어야 할 자리를 차지한 전투기들은 대추리의 이런 상황을 더욱 극명하게 보여준다. 농부와 전경, 푸른 들과 철조망, 손수레와 포크레인 등 절대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것들이 공존하고 있는 마을 풍경은 낯설음과 기괴함을 넘어 진한 아픔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종일 논밭에서 고된 일을 마친 농부들이 밤이면 마을회관에 모여 ‘미군기지 확장 반대’를 외치며 촛불을 밝히는 그 진심 어린 끈질긴 투쟁을 바라보면 이 모든 아이러니한 상황이 크나큰 비극이자 안타까움으로 느껴진다.
뜨거운 투쟁의 현장, 황량한 들판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는 농민들, 그들을 둘러싼 철조망과 전경들의 모습은 관객들의 가슴에 강렬한 이미지로 남아 ‘길’은 진심으로 그들과 함께 한탄하고 연대하게 하는 힘을 발휘한다. 이렇게 ‘국익’의 논리를 앞세워 늙고 힘없는 농부들의 삶을 파괴하고 오히려 ‘죄인’으로 만드는 이 땅의 현실을 ‘길’은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하지만 그 안에서 새록새록 돋는 희망을 놓치지 않는 것이 ‘길’의 미덕이기도 하다.
박쥐
감독 : 박찬욱
배우 : 송강호, 김옥빈, 신하균, 김해숙

인사동 스캔들
감독 : 박희곤
배우 : 김래원, 엄정화, 임하룡, 홍수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