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역할의 고정관념과 젠더 이슈에 대한 성장담 <톰보이>

2020.05.26 18:00:50

풋풋하고 아픈 ‘사회화’의 추억

 

 

 

 

 

 

 

 

[시사뉴스 정춘옥 기자] 로레는 새로 이사온 동네에서 미카엘이라는 이름으로 친구들을 사귄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으로 세계적 주목을 받은 셀린 시아마 감독의 국내 두 번째 정식 개봉작으로, 2011년 제작된 작품이다. 제14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제61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수상했다. 


일상적이고 사랑스러운 에피소드

 

 <톰보이>는 생물학적 성의 정체성에 따른 사회적 성의 질서나 규칙을 거부하는 소녀의 성장기를 담았지만, 이 같은 테마를 가진 기존 영화와는 차별화된 시선을 보여준다. 짧은 머리에 짧은 바지, 민소매를 입은 로레는 이사온 동네에서 처음으로 말을 걸어준 또래의 리사에게 미카엘이라는 거짓 이름으로 자신을 소개한다. 


 10살이라는 로레의 나이는 사회화의 기로에 서 있다. 생물학적으로도 중성적이다. 어떤 면에서 고정관념에서 자유롭고 또 어떤 면에서 그 자유를 포기해야 하는 시점이다. 손가락을 빠는 로레에게 아버지는 말한다. “나도 어릴 때 손가락을 빨았지만 나중에도 계속 그러면 그건 이상한 것이다”. 


 로레는 친구들과 축구를 하며 남자인 그들처럼 윗옷을 벗고 침도 뱉는다. 여동생을 보호하기 위해 거친 몸싸움도 하고 여자 친구와 로맨스도 나눈다. 생물학적 ‘다름’이라는 한계에 부딪히기도 하지만, 그것을 보완하기 위한 방법을 짜내기도 한다. 그렇다고 로레가 사회적 남성 역할을 전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아니다. 아버지에게 운전을 배우고 카드 놀이를 함께 하기도 하지만, 임신한 엄마의 배에 귀를 기울이고 여동생을 세심하게 살피는 섬세한 아이기도 하다. 리사가 로레에게 “넌 다른 아이와 다르다”며 특별함을 느낀 이유도 로레가 그 어느쪽 성에도 속하지 않은 자유로움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의 분위기는 상당히 일상적이고 사랑스럽다. 에피소드들은 차곡차곡 메시지를 쌓아가지만, 단 하나도 과장되거나 작위적이지 않다. 로레가 미카엘이 된 이유가 성적 정체성의 혼란인지 어린아이의 단순한 취향인지 명확치 않으며, 구분할 필요도 없다. 로레는 남자이기 원한다기 보다는 단지 좋아하는 짧은머리와 스포츠 등을 편하게 하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리사는 친구들과 축구를 하고 싶지만 여자라서 끼워주지 않는다고 푸념하지만, 로레는 과감한 플레이로 축구 실력을 자랑한다. 성적 역할의 고정관념에서 단지 자유롭기 위해 로레는 미카엘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질서의 순응, 그 잔인한 과정

 

 로레의 거짓말을 최초로 알게 된 여동생 잔은 사회적 편견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위치인만큼 이해와 지지를 보낸다. 잔은 ‘언니’보다 ‘오빠’일 때 더 능력을 발휘한다고 평가하며, 미카엘을 로레만큼이나 사랑한다. 하지만, ‘사회’ 그 자체를 상징하는 엄마는 아이의 영혼처럼 자유로울 수 없다. 


 더 이상 로레가 거짓말을 지탱할 수 없는 지점에 이르러서 엄마의 행동은 지극히 상식적이며, 결코 틀렸다고 함부로 말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레에게 감정이입한 관객의 입장에서는 무자비한 처분으로 느껴진다. 영화는 정교한 언어로 우리가 얼마나 많은 성 역할의 편견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그 ‘상식’이 억압임을 깨닫게 만든다. “곧 학교에 가야 하는데 다른 방법이 있느냐”는 엄마의 말은, 누구에게나 시린 추억으로 자리잡고 있을듯한 사회화라는 묵직한 폭력의 기억을 일깨우기에 충분하다. 사회적 존재로 순응하는 과정이란 잔인한 것이다. 


 그 누구도 치명적 상황이나 심각한 상처까지 가지 않는 점은 이 영화의 독특한 일면이다. 로레는 파국에 이르러서도 성숙하며 동시에 어린아이다운 밝음과 가족에 대한 사랑을 잃지 않는다. 마치 사회적 성 역할의 거부가 뭐가 그리 심각한 일인가, 사회적으로 만연한 성역할의 고정관념이 얼마나 무의미한 엄숙주의인가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는 순수하고 소소하게 젠더 문제와 성장기의 에피소드를 다루면서도, 사회적 억압과 폭력을 묵직하게 느끼게 한다. 담담하고 가벼운 표정으로 ‘아무에게도 귀찮게 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 로레가 미카엘이 되는 것은 왜 그토록 강경하게 금기돼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안타깝고 아프게 던지는 것이다. 


 로레 역을 맡은 조 허란의 연기가 인상적이다. 조 허란의 실제 친구들로 캐스팅된 아역 배우들의 자연스러운 연기 또한 사실적이고 사랑스러운 또래 문화 묘사에 결정적 힘이 됐다. 엔딩에 이르러 주인공은 로레와 미카엘 사이에서 더 이상 혼란을 느끼지 않는다. 로레는 사회적 질서를 수용하는 것일까? 숲에서 원피스라는 성역할의 굴레를 벗어 버리고 나온 로레가 그런 방식으로 행복해질 수는 없을 것 같다. 열린 결말이지만, 주인공의 미소는 로레라는 진짜 이름으로도 미카엘로 살아갈 수 있을만큼 성숙해졌음을 암시한다. 기존의 젠더 영화와는 또 다른 깊은 성찰로 감동을 안겨주는 감동적인 결말이다.  

 

 

 

정춘옥 ok337@sisa-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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