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 무엇을 보고 무엇을 읽고 있는가. 최근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스타벅스의 '탱크 해프닝'과 배재고등학교 야구부의 '탱크데이' 구호 사건을 보며 씁쓸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스타벅스가 탱크를 활용한 마케팅을 진행했을 때, 그 누가 이것이 우리 현대사의 아픈 기억과 연결될 것이라 상상했겠는가. 우리에게 탱크는 단순히 철갑을 두른 기계가 아니다. 6·25 전쟁 당시 남침의 선봉으로 삼천리 강토를 유린했던 공포의 상징이었으며, 동두천에서 탱크에 의해 희생된 효순·미선 양의 비극, 그리고 5·18 민주화운동 당시 시민들을 짓밟았던 고통의 실체이기도 하다. 이러한 역사의 무게를 가볍게 여기는 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이러한 와중에 이병태 전 대통령 직속 규제합리화위원회 부위원장의 행보는 우리 사회의 역사 인식 논쟁을 정면으로 관통했다. 그는 배재고 사태에 대한 징계 논의가 불거지자, 최근 페이스북을 통해 영국 사상가 토마스 모어를 소환하며, 자신의 분명한 소신을 피력했다. 그는 “자신의 신앙과 도덕적 양심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끝까지 헨리 8세의 권력에 동조하지 않았던 토마스 모어처럼, 나 또한 신념을 지키기 위한 비용을 감수하겠다”는 결
지구촌의 뜨거운 축제, 월드컵이 열리면 경기장의 함성만큼이나 강렬하게 시선을 붙잡는 것이 글로벌 기업들의 광고 향연이다. 맥도날드와 코카콜라, 도미노 피자 등등...이들은 화려한 신기술이나 파격적인 변신을 자랑하지 않는다. 반세기 전과 다름없는 클래식한 맛을 월드컵이라는 무대에 반복적으로 각인시킬 뿐이다. 혜성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스타트업이 판치는 시대, 이 ‘음식료 제국’들의 일관성은 경이로운 생존의 기록이자 신뢰의 증거다. 사람들이 망설임 없이 이들을 찾는 이유는 그 맛이 세상에서 가장 특별해서가 아니다. 전 세계 어디서든 내가 기억하는 그 맛이 정확히 구현될 것이라는 ‘변함없음’에 대한 확신 때문이다. 빅맥 세트 하나를 주문하는 행위는 단순한 끼니 해결을 넘어, 자신이 신뢰하는 가치를 보장받는 대가다. 이 지점에서 묻지 않을 수 없다. 왜 우리 정치는 국민에게 이토록 견고한 ‘맛의 신뢰’를 주지 못하는가. 정치의 ‘맛’은 왜 보존되지 못할까? 한국 정치에서 여야 교체는 자연스러운 민주주의의 생리다. 그러나 뼈아픈 것은 정당의 정강과 정책이 정권의 입맛에 따라 엿가락처럼 휘어지는 현실이다. ‘국민을 위한다’는 구호는 실종되고, 상대의 붕괴만을 노리는
세계 술 시장의 풍경이 달라지고 있다. 한때 술은 ‘취하기 위해’ 마시는 것이었다. 회식 자리에서 잔을 비우는 속도가 친밀함의 척도였고, 높은 도수는 강한 술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음주량이 줄어들고, 한국 역시 폭음 문화에서 벗어나 적당히 즐기는 음주 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는 ‘소버 큐리어스(Sober Curious)’라는 새로운 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 술을 완전히 끊는 금주 운동이 아니라 스스로 음주량을 조절하며 건강과 삶의 균형을 추구하는 라이프스타일이다. 특히 MZ세대를 중심으로 확산된 이 문화는 세계 주류 산업의 판도를 바꾸고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러한 주류 소비 감소 흐름 속에서 한국의 소주가 오히려 세계 시장에서 존재감을 키우고 있다는 점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모순처럼 보인다. 술을 덜 마시는 시대에 왜 소주가 더 주목받고 있을까. 그 이유는 소비자의 선택 기준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술의 가치가 도수와 양에 있었다. 얼마나 빨리 취할 수 있는지, 얼마나 강한 술인지가 중요했다. 그러나 지금은 맛과 향, 음식과의 조화, 그리고 함께하는 경험이 더 중요한 소비 기준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