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은 집을 단순히 비바람을 피하는 물리적 건축물로 보지 않았다. 사람의 온기가 머물고, 좋은 기운과 여유가 깃들며, 삶의 복(福)과 덕(德)이 차곡차곡 쌓이는 보금자리로 여겼다. 이 땅의 동네마다 자리했던 ‘복덕방’이라는 이름 속에는 집을 구하는 일이 단순히 재산을 증식하는 투기적 행위가 아니라, 이웃의 사정을 서로 헤아리고 새로운 인연을 맺어주며 따뜻한 덕담을 나누는 공동체의 거룩한 통과의례라는 철학이 담겨 있었다. 반면, 서양의 언어는 집과 땅을 바라보는 전혀 다른 시선을 대변한다. 영어의 ‘Real Estate’는 직역하면 ‘진짜 재산, 혹은 진정한 토지(Real Asset)’라는 뜻이다. 여기서 ‘Estate’라는 단어는 중세 영주들이 소유하던 영지나 법적 신분적 권리에서 출발했다. 즉, 집이나 부동산을 따뜻한 보금자리나 인연의 장소라기보다는, 철저하게 계약과 법리에 의거해 소유하고 지켜내야 하는 '차가운 경제적 권리'이자 '객관적 물권'으로 정의한 것이다. 이처럼 인간미 넘치는 정서적 유대를 중시한 우리의 ‘복덕방’과, 철저한 법리와 시장 합리성을 바탕으로 한 미국의 ‘Real Estate’는 각자의 방식으로 주거의 가치를 규정해 왔다. 그
올여름 전 세계는 '폭염에 포위된 여름'을 통과하고 있다. 국내 상황은 심각함으로 따지자면 전례가 없을 정도다. 서울에 중대폭염재난경보가 발효되는 등 38도를 넘나드는 날씨가 이어졌고, 경남 양산에서는 42.5도라는 대한민국 근대 기상관측 역사상(1904년 이후 122년 만에 처음으로 42도를 돌파) 역대 최고 기온을 기록했다. 양산을 포함한 영남 일대는 닷새 연속 40도를 웃도는 극한의 열기에 신음했다. 서울도 40도를 넘겼다. 시선을 바다 건너로 돌려보면, 미국 역시 거대한 열의 공습에서 예외가 아니다. 미국은 6월 말 동부를 덮친 열돔(heat dome)으로 시작해 7월과 8월에 이른 지금까지 열돔이 대륙을 순회하듯 이동 중이다. 미국 국립기상청(NWS)이 한때 약 1억 8천만 명을 극한 폭염 경보 아래 뒀으며,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가 섭씨 46.1도(화씨 115도), 애리조나주 피닉스와 캘리포니아주 엘센트로는 섭씨 47.2도(화씨 117도)를 기록하는 등 서부 전역이 펄펄 끓었다. 특히 달궈진 대기와 극심한 건조함이 겹쳐 워싱턴주 등지에서는 대형 산불이 발생해 수천 가구가 대피하는 등 재난 상황이 이어졌다. 그런데 올여름 뜨거워진 것은 지구만이 아니다
대한민국 자본시장이 전례 없는 거대한 혼돈의 도가니에 깊숙이 빠져들었다. 지금 우리 증시가 마주한 현실은 단순한 조정을 넘어 시장의 근간을 흔드는 심각한 위기 신호를 보이고 있다. 올해 코스피 지수의 변동성은 60%를 가볍게 웃돌며, 변동성이 크기로 시쳇말로 악명 높은 가상자산 비트코인마저 추월하는 기현상을 낳았다. 이는 전통적인 자산 시장의 위험 지표를 아득히 뛰어넘는 수치로, 인접한 일본 닛케이 지수 변동성의 거의 두 배에 달하는 충격적인 수준이다. 이처럼 롤러코스터를 방불케 하는 급등락 속에 한국거래소는 올해 들어 수십 번의 매도·매수 사이드카와 서킷브레이커를 발동하며 불안한 숨을 몰아쉬고 있으나, 시장의 브레이크는 번번이 무용지물이 되고 있다. 블룸버그를 비롯한 유수의 외신들은 한국 자본시장의 이러한 기형적 단면을 날카롭게 지적하며 우려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오랜 기간 주식시장에 깊은 관심을 가져온 한국인들, 특히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에 집중된 인공지능(AI) 열풍이 투심을 극단적으로 자극했다는 분석이다. 그러나 혁신 산업에 대한 관심이 건전한 투자가 아닌 무분별한 투기로 변질된 것이 본질적인 문제다. 문제는 한국의 개인 투자자들 대다수가 수
우리는 지금 무엇을 보고 무엇을 읽고 있는가. 최근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스타벅스의 '탱크 해프닝'과 배재고등학교 야구부의 '탱크데이' 구호 사건을 보며 씁쓸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스타벅스가 탱크를 활용한 마케팅을 진행했을 때, 그 누가 이것이 우리 현대사의 아픈 기억과 연결될 것이라 상상했겠는가. 우리에게 탱크는 단순히 철갑을 두른 기계가 아니다. 6·25 전쟁 당시 남침의 선봉으로 삼천리 강토를 유린했던 공포의 상징이었으며, 동두천에서 탱크에 의해 희생된 효순·미선 양의 비극, 그리고 5·18 민주화운동 당시 시민들을 짓밟았던 고통의 실체이기도 하다. 이러한 역사의 무게를 가볍게 여기는 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이러한 와중에 이병태 전 대통령 직속 규제합리화위원회 부위원장의 행보는 우리 사회의 역사 인식 논쟁을 정면으로 관통했다. 그는 배재고 사태에 대한 징계 논의가 불거지자, 최근 페이스북을 통해 영국 사상가 토마스 모어를 소환하며, 자신의 분명한 소신을 피력했다. 그는 “자신의 신앙과 도덕적 양심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끝까지 헨리 8세의 권력에 동조하지 않았던 토마스 모어처럼, 나 또한 신념을 지키기 위한 비용을 감수하겠다”는 결
지구촌의 뜨거운 축제, 월드컵이 열리면 경기장의 함성만큼이나 강렬하게 시선을 붙잡는 것이 글로벌 기업들의 광고 향연이다. 맥도날드와 코카콜라, 도미노 피자 등등...이들은 화려한 신기술이나 파격적인 변신을 자랑하지 않는다. 반세기 전과 다름없는 클래식한 맛을 월드컵이라는 무대에 반복적으로 각인시킬 뿐이다. 혜성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스타트업이 판치는 시대, 이 ‘음식료 제국’들의 일관성은 경이로운 생존의 기록이자 신뢰의 증거다. 사람들이 망설임 없이 이들을 찾는 이유는 그 맛이 세상에서 가장 특별해서가 아니다. 전 세계 어디서든 내가 기억하는 그 맛이 정확히 구현될 것이라는 ‘변함없음’에 대한 확신 때문이다. 빅맥 세트 하나를 주문하는 행위는 단순한 끼니 해결을 넘어, 자신이 신뢰하는 가치를 보장받는 대가다. 이 지점에서 묻지 않을 수 없다. 왜 우리 정치는 국민에게 이토록 견고한 ‘맛의 신뢰’를 주지 못하는가. 정치의 ‘맛’은 왜 보존되지 못할까? 한국 정치에서 여야 교체는 자연스러운 민주주의의 생리다. 그러나 뼈아픈 것은 정당의 정강과 정책이 정권의 입맛에 따라 엿가락처럼 휘어지는 현실이다. ‘국민을 위한다’는 구호는 실종되고, 상대의 붕괴만을 노리는
세계 술 시장의 풍경이 달라지고 있다. 한때 술은 ‘취하기 위해’ 마시는 것이었다. 회식 자리에서 잔을 비우는 속도가 친밀함의 척도였고, 높은 도수는 강한 술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음주량이 줄어들고, 한국 역시 폭음 문화에서 벗어나 적당히 즐기는 음주 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는 ‘소버 큐리어스(Sober Curious)’라는 새로운 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 술을 완전히 끊는 금주 운동이 아니라 스스로 음주량을 조절하며 건강과 삶의 균형을 추구하는 라이프스타일이다. 특히 MZ세대를 중심으로 확산된 이 문화는 세계 주류 산업의 판도를 바꾸고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러한 주류 소비 감소 흐름 속에서 한국의 소주가 오히려 세계 시장에서 존재감을 키우고 있다는 점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모순처럼 보인다. 술을 덜 마시는 시대에 왜 소주가 더 주목받고 있을까. 그 이유는 소비자의 선택 기준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술의 가치가 도수와 양에 있었다. 얼마나 빨리 취할 수 있는지, 얼마나 강한 술인지가 중요했다. 그러나 지금은 맛과 향, 음식과의 조화, 그리고 함께하는 경험이 더 중요한 소비 기준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