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 정춘옥 기자] 오늘날 불평등의 핵심이 개인의 소득이나 능력뿐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부모의 자산과 그 상속 가능성에 있다는 점을 해부한다. 능력주의의 이면에서 ‘상속주의’(inheritocracy)가 구조적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저자 자신의 고백, 인터뷰, 리서치를 통해 제시한다.
자식 세대의 사다리를 걷아차다
이 책에서 ‘엄빠 은행’(Bank of Mum and Dad)은 핵심 키워드다. 이는 부모가 자녀에게 제공하는 주택 구입 자금, 교육비, 생활비, 육아 및 돌봄 지원 등 가시적 지원뿐 아니라, 실패하더라도 언제나 되돌아갈 곳이 되어주는 심리적 안전망 등 비가시적 지원까지를 포괄한다. 교육뿐 아니라 주거, 결혼, 출산 및 육아, 커리어 형성 같은 성인기의 주요 인생 이정표조차 부모의 경제력에 의해 좌우되는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영국의 밀레니얼 세대 역사학자인 저자는 현대 사회에서 상속주의가 본격적으로 나타난 배경으로 베이비붐 세대(대략 1942~1965년 출생)의 자산 축적을 꼽는다.
베이비붐 세대는 전후 경제 성장, 부동산 가격 상승, 연금제도와 임금 상승의 혜택을 누리며 자산을 축적할 수 있었다. 특히, 부동산은 노동 소득보다 훨씬 강력한 자산 증식 수단이 되었다. 베이비부머는 역사상 가장 큰 자산을 보유한 세대가 된 것이다.
이에 비해 밀레니얼 세대(1981~1996년 출생)와 Z세대(1997~2010년 출생) 같은 청년 세대는 높은 교육 수준에도 불구하고 대학 졸업장의 가치는 하락해 한때 계층 이동의 상징이었던 고등교육이 단지 경쟁을 통과하기 위한 기본 조건으로 축소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들은 고물가, 임금 정체, 부동산 가격 급등 속에서 부모의 지원 없이는 자립이 어려운 구조에 놓이게 됐다.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베이비붐 세대가 주택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 뒤 그 사다리를 걷어차버린 셈이다.
어떻게 젠더, 연애, 결혼, 돌봄에 영향을 미치는가
이 책은 교육과 주거 문제뿐 아니라, 젠더, 연애, 결혼, 돌봄과 노후의 문제를 상속주의의 자장에서 살핀다.
20~30대 여성들은 경력과 출산 사이에서 시간의 압박을 경험하고, 이 과정에서 부모의 경제적·시간적 지원 여부가 삶의 경로를 크게 좌우한다.
젊은 세대 사이에서는 비슷한 자산과 문화적 배경을 지닌 짝끼리 결혼하는 동질혼이 더욱 강화되고 있는데, 이는 자산 불평등이 대물림되는 구조를 더욱 고착화한다. 상속주의는 결혼 이후의 삶에서도 불평등을 확대시키는 중요한 요인이다.
상속주의는 단지 돈의 문제가 아니라, 누가 시간을 살 수 있는가, 누가 돌봄 노동의 부담을 덜 수 있는가, 누가 삶의 중요한 결정을 더 여유 있게 내릴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상속주의는 페미니즘의 논점이기도 한 것이다.
저자는 상속을 더 이상 한 가족의 사적 문제가 아니라, 기회와 공정, 돌봄과 복지, 세대 간 책임을 둘러싼 사회 구조의 문제로 바라본다. 저자는 가족 내에서도 돈과 상속, 돌봄 문제에 대해 터놓게 대화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부모의 지원을 받은 사람은 부끄러움과 죄책감 때문에 침묵하고, 지원을 받지 못한 사람은 소외감 때문에 침묵하는 현실에서 개인의 성취는 모두 독립적인 것으로 가정되고, 이 침묵이 상속주의를 은폐함으로써 불평등의 구조는 자연스럽고 정당한 것이 된다.
자전적 서사와 문화 비평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책으로, 특유의 유머와 통찰이 있으며 사려 깊으면서도 진솔하다. 부모의 부와 정보력 등이 자식 교육과 성공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 한국 사회에도 사회적 불평등과 공정성 논의에 중요한 영감을 제공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