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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이화순의 아트&컬처] 82세 거장 '윤석남'이 들려주는 여성독립운동가들의 치열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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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고재에서 3년만의 개인전 <싸우는 여자들>전
강주룡, 권기옥, 김마리아 등 14인 채색화·드로잉
채색초상화와 설치작품으로 여성독립운동가 추모

 

도전은 늘 아름답다. 무모하리라는 예상을 깨고 날개를 다는 인간의 초월성을 볼수 있어서다.
올해 우리나이로 83세, 만으로 82세의 윤석남 작가. '아시아의 대표적인 여성주의 작가'로 손꼽히는 그가 10년전부터 아크릴을 벗어나 채색화를 시작하더니 드디어 본궤도에 오른 채색 초상화로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그린 개인전을 열었다.

 


서울 삼청로 학고재에서 17일부터 4월 3일까지 선보이는 개인전 〈싸우는 여자들>展이 그 현장이다.

손이 떨릴 법도 한데, 정교한 집중력이 요구되는 채색 초상화로 남성들 사이에서 이름조차 없이 스러져가고 있던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살려낸 점은 또다른 기념비적 의미를 갖는다.


서양미술 재료를 썼던 그가 어떤 동기로 한지와 분채를 쓴 채색화로 독립운동가들을 그리게 됐을까.
2011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윤두서의 자화상을 본 것이 계기였다.


“정면을 응시하는 윤두서 자화상의 당당한 눈빛에 매료됐죠.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어요. 여성의 시선을 드러내는 채색화를 그리자고 마음 먹었어요.”


윤석남은 그때부터 그동안 미술재료로 써온 서양화 재료를 버렸다. 채색화를 그리며 과거의 복식 등을 참고하고자 한국의 초상화를 모은 책을 구입했다. 일제강점기에 그려진 책이었는데 방대한 분량 속 여성의 초상은 가장 뒤편에 이름도 없이 단 두점 실려 있는 거였다.


“그걸 보면서 왜인지 울화가 치밀었다”는 윤석남은 “그때 이제부터 어려운 시대, 나라를 위해 싸운 여성들의 삶을 조명하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한다.

 

윤 작가는 독립운동가들을 보면서 '왜 목숨을 바쳐서까지 독립운동을 했을까? 나라면 목숨을 바쳤을까?'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남은 인생을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그리는데 바치기로 결심했다는 그는, 그중 먼저 14인(강주룡 권기옥 김마리아, 김명시, 김알렉산드라, 김옥련, 남자현, 박자혜, 박진홍, 박차정, 안경신, 이화림, 정정화, 정칠성)의 여성 독립운동가 초상화를 완성했다. 그리고 3년만의 개인전이 탄생했다.


일제강점기에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도 아깝게 여기지 않고 남성 못지 않게 싸웠으나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김이경 소설가와 함께 준비했다. 김이경은 기록과 문헌을 바탕으로 14인의 독립투쟁을 소설 형식으로 각색하고 소개하는 글쓰기 작업을 맡았고, 윤석남은 김이경의 글을 참고해 그들의 초상화를 제작했다.

 

일제강점기에 심한 고문으로 인해 생전에 한복 저고리를 입으면 좌우 저고리 길이가 달랐다는 김마리아 (1892~1944), 아기 궁녀 출신의 독립운동가로 단재 신채호(1880~1936)의 아내 박자혜(1895~1943), 87세에 회고록을 남긴 정정화(1900~1991), 혈서를 쓰기 위해 단지(斷指)했던 남자현(1872~1933) 등 나이도 집안도 출신지도 다르지만 모두 대한 독립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던 애국 여성들이었다.

 

윤석남은 17일 학고재에서 “여성 독립운동가의 삶을 조사하면서 떠오른 강렬한 이미지를 바탕으로 초상을 그렸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번 전시에서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초상 연작과 함께 대형 설치 작업도 보였다. 또 김이경 소설가의 동명의 책 '싸우는 여자들, 역사가 되다- 역사를 뒤흔든 여성 독립운동가 14인의 초상'(한겨레출판, 2021)도 빛을 보았다.

 

학고재 본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박자혜의 초상을 만난다. 아기 나인 출신으로 알려진 박지혜는 한일합방 후궁에서 나와 근대교육을 받고 총독부의원의 간호사가 되었다. 이후 1919년 3·1운동 당시 간호사로서 부상자들을 치료하다. 민족적 울분을 느꼈다. 간호사들을 모아 '간우회'를 조직했고, 만세 시위의 동맹파업을 시도하다 체포되기도 했다.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주의 사학자, 언론인이었던 신채호와 결혼해 두 아들을 낳았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으나 대중에게는 그 이름이 아직 낯설다. 박자혜의 초상 왼쪽 위에는 신채호의 초상화도 함께 있다. 손에 든 것은 남편의 유골함이다.

 

전시장 중앙 벽에는 김마리아의 기개 넘친 초상화를 만나게 된다. 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로서 널리 신망 받은 인물이다. 3·1운동을 일으키는 데 적극 가담하였으며 체포 후 극심한 고문을 겪어 평생 후유증에 시달렸다. 1944년 투병 끝에 숨을 거둘 때까지 독립에 대한 열망과 민족의식을 잃지 않았다. 1962년 그의 업적을 기리는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김마리아 초상은 마치 만세를 부르는 듯 당당한 몸짓이다. 황해도 장연 출신인 김마리아는 일본 유학중 2.8독립선언에 참여한 뒤 선언문을 기모노 속에 숨겨 국내로 들여와서 3.1운동을 일으키는 데 적극 가담했다.
또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회장을 맡아 임시정부에 자금을 전달하고 조직을 확대하던 중 동지의 배신으로 검거돼 혹독한 고문을 받기도 했다.

 

선생은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사건 심문과 재판 진술 중에 "너는 언제부터 조선의 독립을 생각해 왔는가"라는 심문에는 "한시도 독립을 생각하지 않은 일이 없다” 라고 진술했다.  또 "여자가 어째서 남자들과 함께 운동을 했나”라는 심문에는 "세상이란 남녀가 협력해야만 성공하는 것이다. 좋은 가정은 부부가 협력해야 이루어지는 것이다"라고 당당히 진술했다.


윤석남 작가가 여성 독립운동가 초상 연작 중 제일 처음 그린 작품은 정정화 초상이다. 독립자금을 마련해 상하이로 전달하는 과정에서 3번이나 체포되기도 했던 정정화는 87세에 회고록을 냈다. 그는 담이 크기로 조자룡 같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고 한다.

 

남자현은 영화 '암살'에서 배우 전지현이 연기한 캐릭터다. 양반가의 딸이었던 남자현은 투쟁 활동도 많이 했다. 암실 시도를 위해 가던 중 배신자의 신고로 체포되었다.
'백마 탄 여장군' '조선의 잔다르크'로 불렸던 김명시 장군 (1907~1949) 초상화도 눈길을 끈다. 마산 출신으로 어머니의 항일 정신에 영향을 받았던 김명시 장군은 중국에서 조선의용군 화북지대에 합류해 최전방에서 항일무력투쟁을 펼쳤으나 1949년 10월 유치장에서 목맨 시신으로 발견된 인물이다.  또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비행사이자 독립운동가인 권기옥(19017~1988)은 멋진 비행사 차림으로 작품화되었다.


'붉은 방'은 여성 독립운동가 추모의 공간

 

학고재 본관 안쪽 방에 들어서면 대형 설치적인 붉은 방 (2021)을 만난다. 윤석남은 '핑크 룸 (1990~2018), 블루룸 (2010-2018) 등의 방' 연작을 꾸준히 제작해 왔다. 그중 붉은색 종이를 활용한 붉은 방은 이번 전시에서 처음 선보인다.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흘린 피와 열망을 상징하기 위하여 붉은색을 선택했다.


종이 콜라주 850여 점과 거울 70점이 전시 공간의 세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다. 종이 콜라주는 작업 초기에 그려둔 200여 가지 도상을 바탕으로 수작업한 것이다. 밑바탕을 그리고 가위로 오려낸 후 두 장의 한지를 맞대어 붙이는 방식으로, 수행적인 노동을 요구하는 작업이다.

 

공간 내부에 자리한 50여개의 나무 조각에 여성 독립운동가의 초상을 추상화해 그려 넣었다. 각기 다른 표정과 몸짓을 한 나무 조각들은 옛 마을 어귀의 장승 무리를 연상시킨다.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추모하는 공간인 셈이다.


남은 인생은 여성 독립운동가 100인 초상에 매진


윤석남은 한국 사회에서 여성 주체의 삶을 드러내는 예술에 반평생을 바쳐온 작가로 유명하다. 그는 '자아'와 '여성', '어머니'에 대한 탐구를 계속했다. 작가의 어머니, 치열한 삶의 현장의 기층 여성 노동자들, 현실 세계의 이성에서부터 허난설헌, 최승희, 김만덕, 바리공주 등 역사와 설화 속 인물에 이르기까지, 40년 동안 여성으로서의 경험과 상상력에 기반해 폭넓은 스펙트럼의 여성상을 그려왔다.

 

온·오프라인에서 동시 개막한 이번 전시 중 온라인에서는 14인의 채색화와 연필 드로잉, 설치 작품인 '붉은 방' (2021) 외에 본관 전시 및 김이경 소설가의 책에 포함되지 않은 오광심, 이병희, 조신성, 김향화, 동풍신, 부춘화, 윤희순, 이화경 등 8인의 초상을 학고재 오룸(OROOM, online.hakgojae.com) 온라인 전시 공간에서 추가로 선보이고 있다.


윤석남은 “힘 닿는 데까지 남은 힘을 다해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기록을 그림으로 그리는 작업을 이어가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자료가 많지 않기에 이번 전시에도 작가적 상상력을 많이 동원해야 했다. 윤석남은 남아 있는 사진 자료를 참고해 얼굴을 묘사하고, 각 인물의 생애에 대한 기록을 토대로 배경과 몸짓을 구상해 그려 넣었다.

 

작가는 제일 먼저 작은 사이즈로 얼굴 드로잉을 하고 인물의 특성을 파악한 뒤에야 원본 크기의 초본을 만들어 한지에 옮기고 채색으로 마무리했다. 이번 개인전에서는 얼굴 드로잉과 소형 초상이 대형 초상화와 나란히 전시되어 초상화의 제작과정을 동시에 볼 수 있다. 그리고 인물의 손은 크고 거칠게 표현했다. 살아온 삶을 정직하게 드러내는 신체 부위가 손이라고 생각해서다.

 

윤석남은 "자립적인 여성의 삶을 대변하는 투박한 손이 작고 고운 손보다 아름답다”고 말한다. 그는 "앞으로 여성독립운동가 100인의 초상을 완성하겠다”고 한다. 그는 이 초상화를 통해 한국 사회에서 여성에게 민족과 국가가 무슨 의미인지, 그리고 우리가 지켜야 하는 '자립'이 무엇인지 진중하게 묻고 있다.

 

세상은 크게 변했지만 동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그 물음은 과거형이 아니라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는 이번 개인전에서 채색화의 기법을 독창적인 어법으로 한 단계 발전시켜 그 물음에 다가가고 있다.

 

김현주 교수(추계예술대학)는 "서양화와 동양화라는 애매한 경계선이 계속 유지되고 있는 한국미술계에서 윤석남의 채색여성초상화는 둘의 경계 짓기 자체에 별 의미를 두지 않는 집에서도 가히 도전적이다"고 평한다.


마흔에 시작한 미술, 도전은 영원한 과제

 

윤석남은 미술을 시작했을 때부터 범상치 않았다. 나이 마흔 언저리에 미술 비전공자로 어느날 갑자기 개인전을 열며 국내 화단에 도전장을 던졌다. 정규 미술 교육을 받지 않은 아웃사이더로서 그림을 시작했던 거다.


1939년 만주 출생인 그는, 36세쯤 '이렇게 계속 가정주부로만 살수는 없다'는 자각이 들었단다. 그리고 43세이던 1982년 서울 미술회관(현 아르코미술관)에서의 개인전을 시작했다. 미국으로 건너가 프랫, 인스티튜트 그래픽 센터, 아트 스투던트 리그에서 공부했다. 1985년 여성 작가 김인순, 김진숙과 함께 '시월 모임'을 결성하여 여성신문 창간에 참여하고, 여성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이후 거의 매년 한국, 일본, 중국 등 국내외에서 활발한 전시 활동을 펼쳤다. 1996년 베니스비엔날레와 2014년 광주비엔날레에 참여했다. 2018년 워싱턴 스미스소니언 박물관 내셔널포트레이트갤러리에서 개최한 <세계의 초상화들: 한국(Portraits of the World:Korea)(2018~2019)에 작품을 선보여 주목 받았다.


1996년, 여성 작가로서는 처음으로 제8회 이중섭 미술상을 수상했다. 이듬해인 1997년에 국무총리상을 받으며 동시대 주요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2015년 제29회 김세중조각상을 수상했다. 2019년에는 여성주의 문화운동에 기여한 공로로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테이트 컬렉션(영국), 국립현대미술관(과천), 서울시립미술관(서울), 아르코미술관(서울) 등 국내 주요 국공립 미술관과 퀸즈랜드 미술관(호주 브리즈번), 오리건주립대 조던슈니처미술관 (미국 오리건), 타이베이 시립미술관(타이베이), 후쿠오카시 미술관(일본 후쿠오카) 등 해외 유수의 기관에서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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