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 강철규 기자]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을 등에 업고 개봉한 영화들을 한국 관객들이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
지난해 10월 개봉한 '그래비티'(관객 320만명)를 제외하고는 지난 2일 열린 아카데미 시상식에 발맞춰 개봉한 '아메리칸 허슬', '노예 12년',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 모두 흥행에 참패했다.
제86회 아카데미에서 10개 부문 후보에 오른 '아메리칸 허슬'은 2월20일 개봉해 12만6188명을 불러 모으는 데 그쳤다. 크리스천 베일, 브래들리 쿠퍼, 에이미 애덤스, 제니퍼 로런스 등 할리우드 톱스타들이 총출동했지만 한국 관객은 그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작품상을 받은 '노예 12년'의 상황도 다르지 않다. 박스오피스 4위에 올라있기는 하지만 34만1950명(12일 기준)이 봤을 뿐이다.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의 성적은 더 심각하다. 누적관객이 4만4903명에 불과하다.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 주·조연상을 모두 받아낸 영화라고는 믿기 힘든 결과다.
아카데미 영화의 부진은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가속화 하고 있다. 2000~2014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남녀주연상을 받은 영화 44편 중 단 7편만이 100만 관객을 넘었을 뿐이다.
관객 100만명을 돌파한 영화 중 '글래디에이터'(2001), '뷰티풀 마인드'(2002), '시카고'(2003),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2004) 등 누구나 기억하는 영화들이 포진했던 2000년대 초반과 비교하면 '슬럼독 밀리어네어'(2009), '라이프 오브 파이'(2013), '그래비티'(2014)의 최근 아카데미는 초라한 게 사실이다.
왜 이런 일이 생긴 것일까.
가장 큰 이유는 국내 영화시장이 한국영화 위주로 재편됐다는 데 있다. 2003년 '실미도'가 최초로 1000만 관객을 넘어선 것에 이어 거의 매년 1000만 관객 영화가 나오고 있다. 관객 점유율 또한 2004년 이후 한국영화가 53.6%로 외화를 앞선다.
할리우드 영화에서만 볼 수 있던 재난·범죄·괴수·액션·전쟁 블록버스터를 우리나라도 만들 수 있게 됐고, 멜로·스릴러·사극 등 영화의 다양성도 강화됐다. 봉준호·박찬욱·김지운 등 대중성과 작품성을 모두 갖춘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감독들이 등장하면서 굳이 아카데미 영화 혹은 할리우드 영화가 아닌 한국영화만으로도 관객의 기대치를 채울 수 있게 됐다.
영화평론가 황진미는 "좋은 한국영화가 많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상을 받았다거나 후보에 오른 사실이 관객이 영화를 선택하는 데 큰 영향을 주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분석했다.
아카데미의 시상 기준이 대중성보다는 작품성을 중시하는 쪽으로 옮겨가고 있는 것도 이유다.
2008년이 기점이다. 제80회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과 감독상은 코언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가져갔다. 남우주연상은 폴 토머슨 앤더슨 감독의 '데어 윌 비 블러드'의 대니얼 데이 루이스, 여우주연상은 올리비에 다한 감독의 '라 비 앙 로즈'의 마리옹 코티아르가 받았다.
이 세 영화는 미국에서도 흥행성공과는 거리가 멀었다. 특히 코언 형제 같은 경우 다수의 국제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거장이지만 아카데미의 성향과는 잘 맞지 않는 작품 세계를 가졌다는 평가가 많았다. '노인을 위한 나라를 없다' 또한 걸작이라고 평할 수 있는 영화이기는 하지만 대중성 역시 중시하는 아카데미와는 거리가 먼 영화였다.
이후 2010년 캐스린 비글로의 '허트로커' 2012년 미셀 하자나비시우스의 '아티스트'에서 올해 스티브 매퀸의 '노예 12년'까지 모두 대중성보다는 작품성에 비중을 둔 수상이 이어졌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아카데미에서 상을 받은 영화들이 부진할 수밖에 없다. 평단이나 영화 마니아들은 이들 영화가 오스카를 거머쥐는 모습을 보고 뿌듯함을 느꼈을지 모르지만, 일반 관객 입장에서 큰 재미를 느낄 수 없는 이런 영화들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자연스럽다. 아예 관심을 주지 않았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지 모른다.
아카데미가 미국적 가치에 부합하는 영화들에게 상을 몰아주고 있는 것도 국내 관객의 외면을 받는 또 다른 이유다. 국내 관객이 아카데미 영화에 공감하지 못하는 것이다.
올해 작품상을 받은 '노예 12년'만 해도 그렇다. 이 영화는 자유인 신분의 흑인 음악가가 노예로 12년을 살고 다시 자유를 얻는다는 이야기다. 물론 작품상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훌륭한 영화이기는 하지만 '흑인 노예'라는 인종 문제는 우리 정서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에이즈 문제를 다루고 있는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 또한 마찬가지다. 에이즈가 표면으로 드러나 있지 않은 우리나라 현실상 영화에 감정을 이입하기가 쉽지 않다.
지난해 작품상을 받은 벤 애플릭 감독의 '아르고'도 중동에서 전쟁을 치르는 미국의 이야기였다.
건국대 영화과 송낙원 교수는 "클래식한 영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영화에 상을 주던 아카데미가 최근 다분히 미국적인 소재의 영화에 상을 몰아주고 있다"며 "이런 부분이 한국 관객들이 아카데미를 외면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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