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공산당 창당 80주년

2001.07.10 00:07:07

현대중국, 모택동이 출산 등소평이 양육


창당 80주년 맞은 중국공산당





“공산당이 존재하지 않은 중국에 새로운 발전이란 것은 있을 수 없다”, 이 구호는 중국 공산당 창당 80주년 열흘을 앞두고 근 한달전부터 방송되는 공익광고이다. 중국은 중국 공산당이 지배하는 일당체제 국가로서, 중국의 주요 대내외 정책은 정부가 아니라 일차적 으로 중국공산당이 결정한다. 이 중국공산당이 80년전, 그러니까 1921년 7월 1일 상하이에서 창당되었다.

중국공산당, 1921년 7월 1일 상하이출생



중국공산당은 중국 노동자·농민운동과 마르크스주의가 결합된 것으로, 1917년 소련에서 볼세비키 혁명이 성공하면서 공산주의가 현실세계에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그 물결은 지리상으로 가장 가까운 중국대륙 안으로 흘러 들어와, 1919년 ‘5·4운동’을 전후하여 중국의 일부 지식인들이 공산주의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1920년부터 베이징과 상하이를 중심으로 공산주의를 연구하는 모임을 결성하였다. 1921년 7월 23일부터 31일까지 소련공산당으로부터 파견된 사라므이 도움으로 상하이의 프랑스 조차지역인 망지로(望志路) 106호에서 각 지역의 대표 13명이 모여 중국 공산당 제 1차 전국대표대회가 비밀리에 개최되었다. 이로써 중국공산당이 탄생 된 것이다.
중국 공산당 창당 80주년을 기념하여 중국내 수백 개의 TV채널에서는 현재까지 중국공산당의 위인들과 관련된 특별 영상기록을 앞다퉈 내보내고 있다. 중앙 관영 TV인 CCTV에서는 6월 15일부터, 1929년 모택동(毛澤東), 주덕(朱德) 등이 인솔한 홍군(紅軍)이 지앙난(江南)의 각 근거지에서 국민당의 대대적인 소탕을 피하기 위해 올랐던 대장정 이야기, <장정(長征)>이란 드라마를 방송했다. 이 드라마는 TV에서는 최초로 첫 회부터 마지막회까지 대장정때 일어났던 모든 사건들을 완벽히 재현해 그 의의가 더 각별하다.

모택동, 현대중국의 국부



또한 창당 80주년을 맞이해, 중국인들 사이에서는 모택동 붐이 일어났다. 우리 나라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중국인들은 모택동에 대한 존경을 넘어서 신처럼 여기며 섬기는 이들도 있다. 인민일보 사이트에서는 6월 14일 모택동의 친손자인 마오신위(毛新宇)를 초청해 ‘나의 할아버지 모택동’이라는 제목으로 공개대화형식의 인터뷰가 있었다.
마오신위는 공산당원이며 역사를 공부했다. 그는 이 공개 대화에서 자신이 역사를 공부하는 가장 큰 이유가 할아버지인 모택동을 비롯한 가정적인 영향이 가장 컸다고 이야기했다.
국가적, 민족적인 측면에서 모택동을 평가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그는 “모택동 개인에 대한 평가보다는 공산중국건설에서 모택동의 역할, 공산당을 현재까지 이끌어온 모택동 사상 등을 높이 사야한다”고 강조했으며, “이렇게 모택동 사상이 지금까지 기초가 되도록 이끌어준 덩샤오핑 동지와 장쩌민 동지의 공을 높이 산다”고 말했다.
중국의 소수 사람들이 모택동을 신으로 섬기는 현상에 대해 많은 중국인들은 미신이라 비난하는 것에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자, 그는 “이것은 미신이 아니라, 모택동에 대한 하나의 존경의 뜻이며, 아주 바람직하다”고 답변했다.
중국인들이 신적 가치까지 느끼며 섬기는 모택동이란 인물은 중국의 사회주의 혁명에서 가장 큰 줄기 이다. 1930년대초, 마르크스주의와 중국인들이 현실적으로 갈구하는 민족주의를 결합시킨 것이 모택동 사상의 핵심이다.
이러한 모택동 사상의 형성은 19세기초 중국의 마지막 봉건왕조인, 청(淸)이 극도로 약화되어 서구 제국주의 열강에 침식되고 난 후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려는 격동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당시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이 중국의 영토를 위협하면서 힘없는 중국 대륙을 반식민지화 시키고 있었다. 이와 같은 때, 마르크스주의를 들고 나온 인물이 바로 모택동이었다.
1921년 중국 공산당이 창당된 이래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역사는 권력투쟁의 역사라 할 수 있을만큼 중국 공산당 내에서는 여러 파벌들간에 끊임없는 갈등과 투쟁이 계속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문화 대혁명(1966-1976)이 될 것이다. 모택동은 자신의 권력 및 사상에 대한 비판이 확대되고, 일부 지식인들은 언론의 자유까지 요구하자, 1957년 6월 ‘반사회주의(反社會主義)의 독초‘를 제거한다는 명목아래, 반우파 투쟁으로 바꾸어 중국의 수많은 지식인, 정치인, 예술가들을 숙청하였다.
모택동이 사망한 후 모택동에 대한 평가는 계속되었는데, 총괄적으로는 그가 위대한 마르크스 주의자였지만, 문화 대혁명이라는 중대한 오류를 범했다는 것이 일괄적인 평가이다. 모택동에 대한 평가는 시각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이지만, 항상 마지막에 모두가 인정하는 것은 그가 중국의 국민적 영웅이라는 것이다.

등소평, 개혁·개방의 선구자



문화대혁명이야 말로 중국 공산당 지도층 내부에 잠복해 있던 권력투쟁이 극단적으로 표출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권력투쟁은 1976년 9월 9일 모택동이 사망한 후 또다시 권력투쟁은 격화 되었다. 바로 어느세력이 모택동의 후계자를 차지하느냐에 따른 것이다.
그의 후계자로 ‘범시파(汎是派)’로 분류되는 화국봉(華國鋒)이 지목되었지만, 그의 지도력과 당(黨).정(政),군(軍)에서의 위치는 아주 취약했다. 이러한 중국 공산당의 권력의 횡포에도 불구하고, 1981년 6월에 열린 제 11기 6중전회에서 등소평의 정치적 승리가 판명되었다. 그 후, 그는 당원을 대상으로 하는 정풍운동을 시도했고, 이것은 개혁, 개방을 추진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1982년 9월, 베이징에서 열린 중국 공산당 12전대회에서 등소평은 “중국 특색에 맞게 사회주의 건설에 앞장서야 한다”고 언급했다.
바로 이 표현은 등소평이 중국의 현실상황에 알맞은 사회주의를 건설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이 날 회의는 역대 중국 공산당 회의중 손꼽는 의미깊은 회의로 기록되고 있다. 오늘날 중국이 경제적으로 거듭난 발전을 할 수 있는 것 또한 이런 등소평의 이론적 바탕이 있었기 때문이라 말할 수 있다.
모택동시대와 등소평시대의 정치적 특징은 바로 변화적 측면에서 엿볼 수 있다. 모택동은 ‘계속되는 혁명’으로서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근거한 흑백논리에 의해 적을 구분했다. 적을 제거함에 있어 ‘계급의 적’이라는 표적을 강조했다. 그러나 등소평시대의 경우에는 경제건설 및 현대화 노선이 주류를 이루었기 때문에, 정치적 경쟁자를 제압하는데 있어, 개혁과 개방의 실용성 및 효과가 투쟁의 기준이 되었다. 모택동이 제거인물을 선택하는데 있어 먼저 비공식적인 회의를 통해 결정한 뒤 공식적인 추인을 얻어내는 과정을 밟은 것에 비해, 등소평은 집권초기에는 제도적이라도 제도 및 절차를 밟는 방법을 선택했다.

강택민체제의 중국(?)



중국 공산당내에는 언제나 파벌이 존재해서 파벌간의 권력투쟁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경제성장과 함께 심각한 권력투쟁은 발생하지 않고 있다. 1997년 12월 등소평 사망 이후에도 중국 공산당 제15차 전국대표대회를 무사히 마쳐 장쩌민(江澤民) 체제로 유지되었다. 장쩌민에 대한 평가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지만, 그에 대해 뚜렷하게 평가할 수 있는 것은 파룬궁이라 말할 수 있겠다.
급속한 발전과 중국인들의 의식변화로 중국공산당에 대한 평가가 자꾸 바뀌고 있다. 필자는 가끔 중국 인터넷에서 중국 대학생들의 화제를 보고 느끼는 것이 있다. 바로 중국 공산당에 대한 그들의 평가와 견해이다. 대체적으로 비평이 많은데, 평가가 수없이 엇갈리고 있다. 창당 80주년을 맞이한 공산당이 창당 100주년을 맞이할지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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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은 <북경어언문화대학 이중언어학과 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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