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림받은 동지(同志), ‘동성애자’
사회적 멸시받는 중국동성애자 3600∼4800만명
“나는
이때까지 살면서, 막연히 사람은 때가 되면 결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 왔어요. 물론 서로 다른 성(性)을 가진 상대끼리 말예요. 처음 동성연애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좀 신선하면서도 이론상으로는 전혀 문제가 없다고 여겼었죠. 그러나, 나중에 실제로 한 쌍의 동성 커플을 보았을 때, 정말이지
토할 것 같았답니다.”
이 말은 북경에 거주하는 한 평범한 직장여성의 동성연애에 대한 솔직한 자신의 생각이다.
우리 나라에서도 얼마전, ‘COMMING OUT’이란 단어를 유행케 했던 모 방송인이 있었다. 모든게 현대화가 되어간다고 하지만, 아직 인류의
머리속엔 동성연애에 대해 관대하지 못하고 현대적인 생각으로 바라보긴 힘든 점이 많다.
아직도 많은 선진국에서 동성연애자들의 사랑 표현은 자유롭지 못하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는 중국, 동성연애에 눈을 뜨는 중국인들도
계속 많아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자유롭게 사랑하고 결혼을 할 수 없다. 중국은 대중매체나 공개적인 장소에서 절대 동성연애에 대한 문제를 거론하지 않는다.
대다수의 중국인들은 동성연애에 대해 비정상적인,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행위로 여기고 있다. 따라서 동성연애자들을 향해 눈살을 찌푸리기도
한다. 여러 방면에서 개방을 시도하고 있지만, 동성애를 아무렇지 않게 거론할 만큼은 아니라는 뜻이다.
중국내 동성애자 호칭 ‘동지’
중국에서 동성연애자들을 일컬어 ‘동지(同志)’라고 한다. 동지(同志)라는 단어는 195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기까지 사회주의 나라 중국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하던 호칭이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가 동지였던 것이다.
그래서 거리에서 낯선 사람한테 길을 물어볼 때도 먼저 ‘동지’라고 부르면 되었다. 지금은 연령과 성별에 따라 부르는 호칭이 많아졌지만, 그때는
‘동지’ 하나면 충분했다. 이 단어가 동성연애자를 뜻하기까지는 아래와 같은 사연이 있다. 1988년, 홍콩의 동성연애자인 모 배우는 동성연애자들만의
영화제를 열었는데, 그 영화제의 영문 제목이 ‘Lesbian and Gay Film Festival’ 이였다. 중문으로도 이름을 만들고 싶었지만,
자기 자신이 동성연애자라는 것을 세상에 알리고 싶지 않았던 까닭에 되도록 암호 같은 이름을 생각해내야 했다.
그러던 중 그가 떠올린 것은 중국의 국부(國父) 손중산 선생의 명언이었다. 말인 즉슨, “혁명은 아직 성공하지 못했지만, 동지(同志)들은
계속 노력해야 할 것이오!” 그렇다. 동성연애자들의 혁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동지들은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남성 동성연애자를 가리키는 호칭도 있다. 먼저 단수(斷袖)라고 하는데, 이 단어의 기원을 알기 위해서는 중국 한(漢)나라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한나라의 애제(哀帝)가 신하인 동현(董賢)을 지극히 총애했다. 어느 날 둘은 낮잠을 자다가 애제가 먼저 잠에서 깨어 일어나게
되었는데, 자신이 동현의 수면을 방해하게 될까봐서 애제 자신의 소매를 자르고 일어났다는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이 단어는 남자 동성애자들을 지칭하는 뜻 이외에도, 동사인 ‘소매를 자르다’의 뜻으로도 쓰이고 있다.
범죄인 취급받는 동성애자
대만의 인터넷 사이트에 기록된 결혼한 동성연애자만 500쌍에 이른다. 이들은 아직 대만 정부로부터 합법적인 허락이 떨어지진 않았지만,
이미 동지연인들의 인터넷 결혼 홈페이지는 아주 잘 마련되어 있다. 이들은 또 이곳에서 만난 동지 친구들의 주례로 결혼식을 하는데, 물론 형식상의
결혼이다.
대륙의 경우는 많은 동지 연인들은 서로의 반려자들끼리 기대고 몸과 마음을 함께 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역시 현존하는 제도적인 문제로,
세계 5개국(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네덜란드, 아이슬란드)이외에는 동성연애자들을 받아들이는 큰문은 아직 열리지 않고 있다. 중국 역시
동지들이 결혼식을 올릴 수 있는 법은 마련되어 있지 않다.
1990년 중국 복건성(福建省)의 한 남자 동성연애 커플이 혼인신고를 했는데, 상급 부서로부터 허락을 받았다. 그러나 얼마후, 그 둘
중 한사람이 다니던 회사에서 쫓겨나는 일이 있었다.
현재 중국에서는 동성연애에 관한 명확한 법적 제도가 없기 때문에 성인들 사이에 이뤄지는 동성애는 밝혀지지만 않는다면 법률제재는 받지 않는다.
문제는 미성년자들의 동성애인데, 미성년자들은 동성애가 밝혀질 경우, 간단하더라도 형벌이 따른다.
P모씨는 대학원을 졸업하고, 모대학에 강사로 나가게 되었다. 대학에서도 인정을 받았으며, 하는 일은 이처럼 순조롭게 잘 되어갔다. 그러나
그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외로움을 느꼈다. 이때 우연히 만난 Q모씨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이 사실은 학교 안에 빠른 속도로 알려졌으며,
그는 곧 학교를 떠나야 했다. 사실 이런 사례들은 이것 이외에도, 더 많이 있다.
아직 중국에서는 동성연애를 범죄행위와 같은 취급을 받고 있다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는 흔한 예이다.
2000년 12월 20일, 중국 호남(湖南)의 한 TV 방송국에서는 <동성애를 향하여>란 프로그램을 방송한 적이 있었다. 참고로
중국의 여러 매체에서 동성연애에 관해서는 침묵을 지키는 것은 말을 하지 않아도 하나의 법과 같았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특별히 남녀 각 동성연애자
커플을 초대해 중국의 사회학자 이은하(李銀河)와 일반인들에겐 아직 낯선 화제인 동성애에 관하여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 다음날 이 방송국은
시청자들로부터 80여통의 전화를 받았다.
그들은 이 방송을 보며 동성연애에 대해 찬성하고 지지하는 태도였으며, 많은 이들이 재방송을 요청했다. 그리하여 이 열화와 같은 성원에
호남 방송국에서는 재방송을 내 보냈다. 여태까지 호남 방송국 이외의 매체에서는 모두 부정적인 태도를 고수해 왔다.
중국 동성애자들은 그렇다면 어디서 사랑을 나눌까? 우선 카페, 공원, 공공 목욕탕 등에서 사랑을 한다고 한다. 이렇게 북경의 동성연애자들만
해도 공식적으로 모임을 70차례나 갖는 다고 한다. 북경에만 해도 동성연애자는 1000명에 이르고, 중국의 상해, 광주와 같은 대도시 이외의
농촌 같은 곳에서 남성 동성애자들이 많이 분포하고 있다.
중국의 동성애사
중국 성(性)역사를 살펴 볼 때, 춘추 전국 시대 때에 동성연애자들의 활동은 아주 잦았다.
한나라 때에 제왕들의 동성연애는 아주 흔한 현상이었으며, 중국의 대부분의 역사상, 사람들이 동성연애에 관하여 아주 관대했던 걸로 기록되어 있다.
청나라 때는 동성연애를 다룬 소설도 3편 이상 있었다.
그러나 남자의 동성애에 대해서는 일부 반대 여론이 생겼고, 이때부터 동성연애자들을 ‘변태(變態)’라는 말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공맹지도(孔孟之道:공자와 맹자가 주장한 인의(仁義)의 도덕)에서 주장한 엄격한 사회의 질서를 강조한 여자로서의 지켜야 할 도리와 남자로서 맡은
직책과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리고 동성연애자들에 대해선 엄격한 처벌이 내려졌다. 이것은 중국 역사상 동성연애자들에 대한 최초의 법적 대응이 되었다.
중국사회 전문가 이은하(李銀河)는 중국의 동성연애자가 성년 인구중 3∼4%를 차지한다고 발표했다. 다시 말해, 약 3600만에서 4800만에
이르는 숫자이다. 그러나 인구가 워낙 많은 중국 당국으로서 일반적인 숫자 통계에는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기 마련이다.
중국 일부 지식인들은 동성연애의 문제에 관하여 따뜻한 시선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하기 시작했지만, 동성연애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는 우리
나라와 마찬가지로 당분간 변함없을 듯하다.
조동은 북경어언문화대 이중언어학과 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