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 미납 파문, 日정가 술렁

2003.11.30 00:11:11






연금미납으로 사임한 칸 나오히토 민주당 대표가 사죄하고 있는 장면.

일본은 지금 국민연금 문제로 연일 시끄럽다. 국민연금법 개정은 여당인 자민당과 고이즈미 정권이 가장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는 개혁 드라이브중의 하나다. 하지만, 이러한 현 정권의 ‘야심작’을 관철시키기 위한 여론 조성 및 국회내 법안 통과가 무르익고 있는 판에 지금까지 연금을 미납한 정부 각료나 정치인들이 속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보다도 솔선수범해야 할 정치인들이 이 모양이니, 새 연금법이 일반 국민들에게 씨가 먹히겠냐”는 등의 냉소적인 여론이 날로 팽배해지고 있다.


고이즈미 오른팔 잃어

5월12일 현재까지 알려진 연금 미납 현직 관료만 해서 아소 타로(麻生太郞) 총무대신,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방위청 장관, 그리고 나카가와 쇼이치(中川昭一) 경제산업대신 등을 포함한 모두 7명이다. 이들의 면면은 이름만 들어도 금방 알 수 있을 정도로 한결같이 일본 정계를 주름잡는 ‘거물급’ 정치인들이다. 이 때문에 금번 사건으로 일본인들이 느끼는 실망감과 충격은 더욱 컸다.

무엇보다도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일본 관방장관은 금번 연금미납 사건의 ‘결정타’를 날렸다. 한 주간지에 의해 폭로된 자신의 연금미납 사실을 처음에는 어물쩡어물쩡 미루다가, 지난달 28일에서야 기자회견을 통해서 1990년 2월부터 1992년 9월까지, 1995년 8월부터 12월까지 국민연금에 미가입, 결과적으로 “당연히 내야할 보험료를 내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했다.

한국에는 다소 생소하지만, 일본의 관방장관이라 함은 일본 내각부내에서 총리대신 다음가는 제2인자 자리로, 우리로 치자면 대통령 비서실장 정도에 해당한다. 여기에 대변인 역할을 겸하고 있어 거의 매일처럼 총리관저에서 정례 브리핑을 갖는 창구 역할도 하는 포스트가 바로 관방장관이다. 후쿠다 관방장관은 ‘카게노소우리(陰の總理, 그림자 총리)’라는 정치적 닉네임대로 고이즈미(혹은 정권)의 시어머니 역할을 톡톡히 하는 그야말로 없어서는 안될 인물로 인식되어 왔다.

그런 그가 이번달 7일에 있었던 총리관저의 정례브리핑 도중에 갑작스럽게 사임을 표해, 일본정계는 물론 온 국민이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했다. 사임 발표를 하기 전에 이미 심적인 결심을 했는지, 그리고 고이즈미 총리와 사전에 ‘통하였는지’에 대한 여부는 아직 확실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사임 후 그는,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지는 것 아니냐”라는 애매한 선문답과 관방장관직에 대한 미련을 남긴 채 3년 반 동안 정들었던 총리관저를 유유히 떠났다. 이유야 어찌되었건간에 고이즈미로선 실로 ‘오른팔’을 잃은 셈이다.


제1야당 대표까지… 국민 충격







일본 중의원 후생노동위원회에 출석, 국민연금 보험료의 미납 혹은 미가입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각료들.

후쿠다 관방장관이 3루타 정도였다면, 민주당의 칸 나오히토(菅直人) 대표는 ‘홈런타’를 날렸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금번 연금 미납파문의 불씨가 제1야당인 민주당에까지 번진 것이다. 그것도 당의 얼굴인 대표가 연금을 미납하지 않은 웃지도 울지도 못할 일에 일본 정국은 술렁거리고 있다.

그가 후생성 대신을 역임하고 있었을 때인 1996년 1월부터 10월까지 국민연금에 미가입했던 것이 문제의 발단이 되었다. 미가입 여부가 밝혀지기 직전까지만 해도 그는 ‘미납 3형제’라는 표현을 써가며 현정권 각료들의 연금미납 사실을 강도 높게 비난했었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비난을 받는 당사자가 된 것이다. 결국 그도 빗발치는 여론과 당내 비판에 못 이겨 후쿠다 관방장관처럼 당대표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칸 나오히토는 젊은 세대와 개혁세력을 그 지지층으로 1996년 민주당을 결성, 현재에 이르기까지 당의 간판으로서의 역할을 해왔다. 제1야당인 민주당은 일찌감치 섀도 캐비넷(Shadow cabinet)를 구성, 고이즈미 정권의 퇴진만을 기다리고 있던 터였다. 물론 칸 나오히토는 새 내각의 총리감으로 일찌감치 물망에 올라 있었다. 하지만, 그의 연금 미가입 파문은 당 대표직 사임은 물론, 향후 그의 정치적 진로까지 위협하게 되었다.


거물들 ‘커밍아웃 러시’

한편, 우리에게도 낮익은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 전 일본총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각료로 재임중이던 1987년 4월부터 10월까지, 그리고 1990년 4월부터 1991년 9월까지 해서 총 25개월간의 보험료 미납 사실을 그의 지구당 사무실을 통해서 11일 밝혔다.

자민당과 함께 연립여당을 구성하고 있는 공명당도 당내 자체조사를 통해, 칸자키 다케노리(神崎武法) 대표를 필두로 간사장, 정조회장(정책위의장격) 등의 집행부를 포함한 현역의원 10여명이 국민연금 미납 혹은 미가입했음을 12일 발표했다.

불과 하루 전까지만 해도 칸자키 대표는 야당 민주당의 칸 나오히토 대표의 미납 사실에 대해 강한 톤으로 비판했을 뿐더라, 공명당의 수뇌부들은 ‘연금제도관련개혁법안’ 마련을 주도적으로 추진해 왔던 핵심멤버들이라는 점에서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게 되었다.

국민연금 미납파문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민주당의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전 대표가 자신의 홈페이를 통해 미납 사실을 시인했다. 여성 당수이자 중의원 의장으로 여성의 정계진출 ‘원조격’에 해당하는 도이다카코(土井たか子) 전 사민당 당수도 연금미납이라는 도마 위에 올랐다. 이 밖에도 요코미치 다카히로(橫路孝弘) 민주당 부대표 등 여야를 막론하고 거물급 정치인들의 국민연금 미납 및 미가입에 대한 ‘커밍아웃 러시’가 줄을 잇고 있다.


미납자 무려 100명 이상







연금미납으로 사임한 후쿠다 관방장관(위 오른쪽), 칸 나오히토 민주당 대표 (위 왼쪽), 그리고 여타 각료들.

교도통신이 11일 현재까지 현역 국회의원을 대상으로 실시한 앙케이트 결과에 의하면, 국민연금의 의무가입이 시작된 1986년 이래로 공적연금보험료를 지불하지 않은 적이 있는 의원이 무려 54명이나 되었다. 동 조사에 응하지는 않았으나, 자신의 홈페이지 등 다른 방법으로 미납 혹은 미가입 사실을 인정한 의원 40명, 그리고 미납 각료를 합치면, 어림잡아 100명 이상은 족히 넘는 숫자다. 여기에다가 현지사, 시장 등 각 지자체장들도 하나둘씩 미납 대열에 합세하고 있어 당분간 그 수는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이와 같은 연금미납 사실에 대한 커밍아웃이 이어지는 것은 “이왕 맞는 매라면 빨리 맞는 것이 낫다”라는 논리가 작용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다시 말해, 지금 미납 사실을 숨기고 있다가 나중에 발각되는 것보다, 수적인 논리에 힘입어 자신의 도덕적 내지는 정치적 책임을 희석화시키려는 의도로 여겨진다. 이들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단순한 사무착오로 지불하지 못했다”고 대답하는 경우가 많아, 국민연금에 대한 인식 및 이해 자체가 부족함을 여실히 드러냈다.

여야가 이례적으로 합심해 국민연금법 개혁이라는 ‘거사’를 치루려다가 오히려 정책입안자 자신들의 약점만 잡히는 형국이 되었다. 한 마디로 ‘긁어 부스럼 만든 격’이다.

보험료 단돈 몇 푼 아끼려다가 자신의 정치생명의 위태로움은 물론, 더나아가 일본 정가의 정치지형이 요동칠 가능성도 조심스럽게 점쳐지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를 반영하듯, 일본국회에서도 연금제도관련법 개정안의 ‘선 국회통과, 후 개혁추진’이라는 낮은 포복으로 국면전환을 꾀하는 듯한 인상이나, 동 법안 시행에 대한 일본인들의 싸늘한 시선은 상당기간 지속되리라 사료된다.

동경통신원 라경수 rhaso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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