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 리포트 - “촛불의 참의미를 되새겨야할 때”

2004.03.22 00:03:03


한국의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이라는 헌정사 초유의 사건은 일본열도를 뒤흔든 강진이었다. 탄핵안 가결 하루 전날인 3월11일까지만 해도 일본 정부와 언론은 이구동성으로 “과연 가결될 수 있을까?”하면서 회의적인 목소리로 일관했다. 막상 가결이 된 후에는 어안 벙벙해 했지만 이내 일본 자국에 미칠 파장 및 손익을 계산하느라 분주했다.

일본의 대표적 공영방송인 NHK를 비롯한 각 방송사들은 앞다퉈 한국의 탄핵안 가결에 대한 속보와 함께 거의 매일 특집방송을 편성하는가 하면, 대부분 주요 일간지들도 이에 질세라 가결 다음 날인 3월13일자 사설에 관련 논평을 싣는 등 금번 탄핵공방을 대서특필했다. 이에 이웃나라 일본언론 및 일본인들이 한국의 탄핵정국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주요신문의 논조분석과 몇몇 일본인들에 대한 인터뷰를 통해 다양하게 접근해 보고자 한다.

“소모적인 정쟁”
먼저 평소 한국보도에 비중을 두고 있는 아사히신문은 13일자 사설을 통해 “금번 사태가 이웃나라의 내정문제인 관계로 구체적인 언급 자체가 조심스럽지만 노무현 정권이 이제 겨우 일년이 지난 시점에서 여야의 소모적인 정쟁이 결국 탄핵안 가결이라는 심각한 전개를 불러왔다”고 긴급 논평했다. 탄핵사태의 근본원인에 대해서는 여야의 ‘쌍방책임론’을 제기, 노무현 대통령의 딱딱한(?) 자세에도 문제가 있으나 야당의 무리한 행동에도 문제가 있다는 입장을 취했고 여야당의 고도의 ‘정략적 플레이’라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고 주장했다. 더불어 지역대립, 보스정치, 금권정치로 얼룩져 왔던 한국 정치풍토를 바꿔가는 하나의 과도기적 진통으로 해석하면서 대북외교정책에 대한 동요와 함께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발전’이라는 그간의 성과에 대한 국제적 평가에 마이너스로 작용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 어린 촌평도 덧붙였다.

마이니치신문은 한국내 정치상황보다는 현재 한창 무르익고 있는 6자 회담에 그 불똥이 튀지 않을까하는데 초점을 맞췄다. “북한 핵문제라는 중대한 현안을 두고 그 어느 때보다 한미일 관계가 긴밀해야 할 때 한국내 정치대립이 발목을 잡는 형국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현재 대통령을 비롯한 한국정치는 탄핵안 심판결과보다는 온통 4·15 총선에 마음이 가 있다”고 지적했다.

일본 최대 경제신문 니혼게이자이도 “현재의 대통령 부재 상황이 계속되는 한 내정 및 외교에 대한 광범위한 악영향은 한국의 대외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힐 것”이라고 보도하면서 급격한 주가폭락으로 한국민의 소비심리와 내외적인 투자심리 위축을 불러올 수 있으며, 현재 한창 진행중인 FTA(한일자유무역협정) 논의에도 악재로 작용할 것으로 내다봤다.


치밀한 정치적 계산 의심
한편, 보수적 색채가 짙은 요미우리신문은 “4월 총선 승리를 위한 노무현 대통령의 치밀한 정치적 계산이 사전에 있었을 것”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이 때문에 탄핵안을 저지했던 우리당 의원들의 집단 행동은 당의 개혁적 이미지를 전 국민에게 어필할 수 있었던, 말하자면 사전선거운동의 측면도 있음을 꼬집었다. 사사건건 발목을 잡히는 소수여당이라는 한계에서 벗어나기 위한 하나의 ‘정치쇼’라는 인상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산케이신문은 국민이 직접 뽑은 노무현 대통령이 권좌에서 물러나기는 그리 쉽지 않을 것이지만 대통령의 공백으로 일어날 수도 있는 북한의 여론 선동을 배제할 수 없음을 짚었다. 또한 14일자 신문 일면 머릿기사에 ‘노무현 대통령의 한(恨)의 정치’라는 제목으로 “탄핵사태까지 오게 된 이면에는 노 대통령의 서민성, 빈곤, 고졸학력 등의 복합적 콤플렉스가 강하게 작용했다”며 서민적 인간미를 느끼게 하는 노 대통령의 정치 스타일 근저에는 “학력 엘리트를 중심으로 하는 기득권층에 대한 뿌리깊은 한의 정서와 피해의식이 사로잡혀 있다”고 정의, “‘한풀이 정치’를 뛰어넘어 어떻게 비판세력까지 아우를지가 향후 정권안정의 열쇠가 될 것”으로 전망했다.


국회 내 몸싸움 충격
그렇다면 이번 탄핵가결에 대한 보통 일본인들의 생각은 어떨까? 현재 대학원생인 스기야마 아키에(杉山明枝, 33) 씨는 “여야의 철저한 정략적 의도에 기인하고 있다는 의심을 떨칠 수 없으며 일본 언론들도 대체로 그러한 방향으로 보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일반인들의 눈에는 대통령 탄핵이라는 문제의 본질과 심각성보다는 신성한 국회내에서 치고 받고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등의 과격함이 더 놀라웠다”고 덧붙였다.

익명을 요구한 A씨(42)는 촛불시위를 비롯한 일련의 흐름을 주의 깊게 지켜보면서 “무엇보다 한국인들의 높은 정치적 관심도와 적극적인 참여도에 놀랐다”며 “일본인들에게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수준 높은 태도”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시미즈 이치로(淸水一郞, 66) 씨는 “있어서는 안될 불행한 일”이라고 안타까움을 표현하며 “여야의 이른바 ‘10분의 1 논란’은 ‘그 나물에 그 밥’ 격으로, 북한핵를 둘러싼 외교문제 등 보다 본질적이고 중요한 문제에 범국민적 지혜를 모으지 않고 있는 점이 아쉽다”고 토로했다.

일본내 한반도 문제 전문가로 유명한 고하리 스스무(小針進) 시즈오카 현립대 교수도 필자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금번사태를 국제사회라는 보다 넓은 틀 속에서 조망할 필요가 있다고 진단했다.

“현재 한국은 이번 탄핵사태로 심각한 국론 양분현상을 보이고 있다. 물론 가결시킨 쪽과 가결 당한 쪽 그리고 탄핵 찬성과 반대 쪽 모두 나름대로의 논리가 있을 줄 안다. 하지만 더이상 국내 정치문제가 내정만으로 끝나지 않는 시대다. 국제사회가 바라보는 시선은 매우 냉엄하고 현실적으로 항상 곱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일본이라고 예외일 수 없다. 나뒹구는 국회 투표함을 바닥 고정용으로 교체해야한다는 CNN방송의 비아냥을 냉철히 곱씹어야 한다. ‘자신을 태워서 주위를 밝힌다’는 촛불의 참의미를 탄핵 찬반 시위 참가자들은 곰곰이 되뇌일 때다.”

라경수 (와세다대 국제관계학 박사과정) rhaso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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