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구 종말을 철썩 같이 믿는, 되는 것 없고 하는 것 없는 보통의 청춘들이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세상에 흔적을 남기기 위해 발버둥친다. 2014년 부산국제영화제, 서울독립영화제의 화제작이며 2015년 런던한국영화제 초청되기도 했다.
기획, 각본, 연출, 촬영, 편집, 출연 1인 6역 소화
“내일 세상이 멸망한다면, 넌 뭐 할 거야?” 지구 종말론으로 떠들썩한 연말, “죽기 전에 뭐라도 남겨보자”라는 일념으로 친구와 함께 영화를 찍기로 한 상석은 영화제 레드카펫을 밟는 헛꿈에 젖은 것도 잠시, 어수선한 현장 분위기를 감지한 여배우와 촬영 감독은 돌연 잠적해버린다. 그날 이후, 상석은 유서인지 시나리오인지 모를 자신만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기 시작하고, 우연한 만남을 반복하는 신비로운 여인 이화와 마지막 날을 함께 하기로 한다.
주목할만한 데뷔를 한 백재호 감독은 다수의 상업영화와 독립영화에 출연한 배우 출신 감독이다. 동국대학교 광고홍보학과를 졸업한 후, 대형 연예기획사와 극단에 소속돼 배우로 활동했던 백 감독은 ‘쌍화점’(2008), ‘10억’(2009), ‘두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2012) 등 다수의 영화를 통해 조, 단역으로 이름을 알렸다. 하지만 계속해서 누군가가 써주기만을 기다리는 것에 지쳐 영화 공부를 시작했다고. “처음에는 단편영화를 만들어서, 다른 감독들에게 백재호라는 배우가 있다는 걸 알리는 게 목표였다. 나아가 영화를 만드는 방법을 알아두면 연기할 때 도움이 될 것 같기도 했다”는 그는 이후 ‘산타바바라’(2013) 프로듀서, ‘별일아니다’(2013), ‘플랑크 상수’(2014)의 제작부 생활을 거치며 영화 현장을 익혀나갔다.
그는 동료이자 친구들과 함께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를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기획, 각본, 연출, 촬영, 편집, 출연까지, 1인 6역을 소화해 낸 백재호 감독은 “우리 이야기를 쓰고, 우리가 직접 출연해야만 진심을 잘 전달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며, “꿈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는 응원을, 꿈을 잠시 잊은 누군가에게는 그 꿈이 다시 떠오르는 자극이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캐릭터 동명 ‘무명배우’들의 리얼한 연기
대학에서 연기를 전공한 후, 그 누구보다 영화를 사랑하는 젊은 청춘들이 삼삼오오 모여 꾸려가는 영화 제작기인 이 영화의 차별점은 바로 출연진에 있다.
극중 상석으로 출연한 배우 김상석, 극중 태희로 출연한 배우 김태희, 극중 재호로 출연한 배우 백재호는 모두 동명의 캐릭터로 등장한다. 그들은 극중 캐릭터와 실제 본인들이 처한 상황을 오고 가며, 영화 속 설정의 경계를 허물며 극의 긴장을 불어넣는다. “밤 하늘의 별이 되고 싶다… 지구 멸망하기 전에는 뜰 거여”, “내 안에 뭔가가 계속 쌓여가는데 그걸 표출할 데가 없어. 남들이 불러주기만 하는 거 지쳤어 이제”, “평생 가도 장편은커녕 단편 주인공도 못 하는 사람도 수두룩해” 등과 같은 극중 캐릭터와 실제 인물들의 캐릭터를 뒤섞은 자기 반영적 대사들을 통해 청춘영화의 공식을 따르는 듯 보인다.
그러나 영화는 이 지점에서 그치지 않고, 영화 속 영화를 등장시킨다. 또한, 지구 종말이라는 흡사 공상과학 영화에서나 볼법한 장르적 설정을 차용함으로써 보통의 ‘영화 만들기에 관한 영화’이기를 거부한다. 극중 상석이 써 내려가는 시나리오 속 인물들을 실제 캐릭터로 등장시킴으로써 팽팽한 극적 긴장감을 형성함과 동시에, 지구 종말이라는, 다소 판타지적인 소재를 십분 활용해 극중 인물들에게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는다. 마지막 날 떠오른 태양을 보며, “세상이 멸망하지 않았으니 우리 다시 기회를 얻은 거잖아요. 우리 잘 할 수 있어요. 나, 열심히 잘 살아볼 거예요”라고 말하는 상석의 외침처럼 영화 속 지구 종말은 세상의 끝이 아닌, 청춘들에게 전하는 새로운 응원의 메시지로 다가간다. 이렇듯 청춘, 멜로, 공상과학 영화의 성격을 고스란히 차용하면서도 청춘들의 이야기를 다층적으로 풀어내는 백재호 감독의 연출력은 신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