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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 탄생 100주년’…無에서 有 창조한 경제 거인

오는 25일 탄생 100주년 맞아…경제 발전과 남북교류에 기여

이종근 기자  2015.11.22 21:3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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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뉴스 이종근 기자]오는 25일 정주영(1915~2001)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태어난 지 100주년을 맞는다. 정주영 명예회장은 생전에 한국 경제 발전과 남북 교류의 기틀을 다진 거목으로 평가된다.

자유기업원이 지난 2010년 전국 20개 대학 2019명을 대상으로 '다시 부활하기를 바라는 기업인은?'을 물어본 결과, 65%가 정주영 명예회장을 꼽았다. 2위는 고(故) 이병철 삼성 창업주(25%)로 나타났다.

이는 정 회장이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 도전 정신'의 상징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강원도 산골 가난한 농가에서 6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정 전 명예회장은 16세에 소판 돈 70원을 갖고 상경해 지금의 현대그룹을 일궜다.

◆창조적 기업가 정신과 인간중심 경영

가난한 농부였던 부모에게 물려받은 근검·성실함은 정 회장의 가장 큰 자산이었다. 신뢰를 저버리지 않는 생활철학과 새로운 것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의식도 남달랐다.

정 회장은 현대건설을 설립하고 본격적인 기업 경영에 나선 이후 몇 차례나 위기를 겪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특유의 도전정신으로 위기를 극복했다.

정 회장은 특히 사업 초기 고령교 복구공사(1953년)에서는 파산 위기에 내몰릴 정도로 막대한 손실을 봤다.

1953년 정부는 6·25 당시 파괴된 고령고를 복구하기로 했다. 당시 정 회장은 장비부족으로 인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폭등하는 물가 탓에 인건비와 자재비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공사를 시작할 때 40환이던 쌀 한가마 값이 4000환까지 치솟았다. 하지만 정 전 명예회장은 막대한 손실로 집을 처분해야 했지만 결국 계약기간 안에 공사를 마쳤다. 신용을 지킨 셈이다.

사업현장에서 노사문제로 많은 진통을 겪기도 했지만, 정 회장은 '인간중심의 경영철학'을 직접 실천했다.

정 회장은 평소 "나는 성공한 기업가가 아니라 단지 부유한 노동자"라고 말하며 사원들과 어울렸다. 젊은 시절에는 직원들과 씨름·배구 등을 함께 하는 것을 좋아했다. 신입사원 수련대회에는 단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었다.

정 회장은 기술혁신과 산업고도화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 원천이 인재양성에 있다고 강조했다. 자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한국의 가장 큰 무기는 우수한 인적자원과 근면성이라고 생각했다. 일단 선발된 인재들에게는 '권한과 책임'을 부여해 그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지금의 현대가(家)가 있기까지

정 회장은 격동의 한국 현대사에서 국가경제발전에 가장 크게 이바지한 기업인이다. 정 전 명예회장은 1947년 현대를 창업해 중화학산업을 비롯한 국가기간산업을 일으키는데 기여했다.

현대그룹은 1947년 5월25일 중구 초동에 '현대토건사'가 설립되면서 시작됐다. 첫 출발 당시 직원은 기능공 10여명 정도였다. 사무실도 한 해 전에 설립한 '현대자동차공업사' 건물의 한편을 이용하는 초라한 살림살이였다.

정 회장은 1950년 1월 '현대토건사'와 '현대자동차공업사'를 합병해 '현대건설주식회사'를 설립했다. 당시 자본금은 3000만원, 종업원은 25명에 불과한 소규모 영세 건설업체였다. 현대건설은 미군공사와 전후복구공사를 수행하며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했다.

현대건설이 국내 건설업 순위 1위에 오른 것은 이로부터 창립 10년만인 1960년이다. 자본금 1억원, 종업원 125명의 종합건설회사로 부상했다. 정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1차기간이 끝난 1966년 현대의 자산은 28억8800만원, 매출액은 40억5770만원으로 확대됐다.

현대는 1960년대 말부터 자동차, 중공업 등 중공업분야에 진출하면서 사업다각화를 추진했다.

현대가 그룹체제로의 변신을 시도한 것도 이 무렵이다. 현대 그룹은 1971년 1월 그룹회장 직제를 신설했다. 이는 60년대 초반부터 설립해 운영해온 건설업 관련사와 함께 새롭게 진출한 자동차 등 이미 8개의 회사를 운영하게 됨에 따라 새로운 경영구조가 요구됐기 때문이다. 현대는 이후 조선사업 진출 등 중공업 위주의 사업다각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함에 따라 70년대 말 계열사 수가 30여 개로 늘어났다.

현대가 재계 정상의 기업으로 군림하게 된 것은 새롭게 이전한 세종로 사옥 시대인 70년대 중반부터다. 건설·자동차·조선을 주축으로 한 중공업체제의 구축이 완료된 시기다.

이 같은 성장세는 매출액의 급격한 증가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1971년 239억원이었던 매출액은 3년 후인 1974년에 1204억원으로 늘어났다. 다시 3년 후인 1977년에는 1조3278억원으로 1조원대를 돌파했다. 현대가 매출액 10조원대를 돌파한 것은 1986년(12조199억원)이었고, 1999년에는 매출액이 97조원에 이르렀다.

◆실패로 끝난 정치 도전

1992년 초 정주영 전 명예회장은 정계진출을 선언한다. 정 전 명예회장은 정치를 개혁해서 선진한국, 통일 한국을 완성해보고 싶었다.

정 전 명예회장은 통일국민당 창당 3개월 만에 31석을 차지해 원내에 진출했다. 5월 정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지만, 같은해 12월 대선에서 고배를 마셨다.

188만표를 얻어 16.3%로 낙선한 정 회장의 숨통을 조여온 것은 국세청을 동원한 현대그룹 계열사에 대한 고강도 세무조사였다. YS정권은 정 전 명예회장을 검찰에 세웠다. CD(양도성 예금증서)와 DR(주식 예탁증서) 발행이 봉쇄되기도 했다.

이후 5년간 현대는 숨죽이며 경영을 하는 신세가 됐다. 하지만 정 전 명예회장은 이 상황에서도 특유의 긍정정인 태도를 보였다.

그는 자서전을 통해 "내가 낙선한 것은 나의 실패가 아니라 YS를 선택했던 국민의 실패며 나라를 IMF 상황으로 몰고 간 YS의 실패다. 나는 그저 선거에 나가 뽑히지 못 했을 뿐이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