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Z EZViwe

별과 별 사이만큼 먼 계층 간극 tvN ‘감자별’

정춘옥 기자  2014.03.18 21:59:58

기사프린트


 tvN 시트콤 ‘감자별’은 김병욱 PD 특유의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을 비롯해 사회적 약자, 어린아이, 노인 등에 대한 각종 편견을 깨트린다. 그의 시트콤 속에서 늘 그래왔듯이 며느리는 시아버지와 사사건건 맞서고, 노수동의 도움으로 차고에서 살며 도우미로 일하는 길선자는 힘겨운 처지에도 불구하고 노수동 가족을 비난하고 투덜대기 일쑤다. 아이들은 마냥 순수하지만은 않고 노인은 자애롭지 않다는 김병욱의 가치관은 이제는 그다지 새롭진 않지만 현재 지상파를 점령하는 대부분 드라마에 비해서는 여전히 신선하고 앞서 있는 것은 사실이다.
 계층문제에 대한 통찰도 전작들과 마찬가지다. 상류층 남성과의 결혼에서 부모의 반대에 부딪히거나, 힘을 가진 자의 폭력에 의해 부모의 죽음을 목격한다는 식의 선정적이고 극적인 설정으로 계층문제를 언급하는 것이 대부분 한국 드라마의 문법이다. 하지만, 김 PD는 표면적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힘의 구도 속에서 갑과 을의 현실적인 갈등과 너무도 일상적인 을의 비애를 잔잔하게 드러냄으로써 갈등을 더욱 체감하게 한다. 길선자는 눈물짓거나 착하고 순한 전형적 약자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입바른 소리는 그녀의 특기다. 노씨 가족이 아무리 차고에 살게 해 준 은혜를 베풀었다고 해도 있는 자의 은근한 거만함에 배알이 꼴린다. 그리고 그녀는 늘 인생역전을 꿈꾼다. 노씨 집안 사모님을 도우미로 부리는 길선자의 허황된 꿈은 이 땅의 모든 을의 꿈이기도 하다.
 ‘감자별’은 멜로에서도 지상파 드라마의 일반적 공식을 벗어나 있다. 따지고 보면 이 드라마 주인공들의 처지는 웬만한 신파극 이상으로 비극적이다. 노씨 가족은 경제적으로 부유하지만 막내 준혁은 유괴범들에게 납치돼 잃어버렸고, 장남 민혁은 의문의 사고로 머리를 다쳐 기억을 잃고 7세 지능의 어린아이가 됐다. 드라마 중반에 민혁은 기억을 찾지만 동생의 여자를 사랑하고 가슴 아파한다. 준혁은 가짜 아들이란 신분(적어도 자신은 그렇게 알고 있다)으로 노씨 가족에 살고 있다.
 그래서 준혁과 노씨 가족의 차고에 사는 나진아의 사랑은 독특한 구조다. 드라마에 흔하디흔한 재벌 2세는 아닐지라도, 준혁은 나진아에게 올려다보기 어려운 위치의 이성이다. 그러면서도 준혁이 이 집에 들어오기 전에 가난한 날들을 함께 한 동지기도 하다. 어린시절부터 부모를 잃은 기억도 가난에 대한 기억도 두 사람은 공유하고 있다.
 시트콤임에도 불구하고 페이소스가 진한 둘 관계에 비해 민혁의 사랑은 판타지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감자별’은 민혁의 사랑 또한 별과 별 사이만큼 멀고 비현실적인 느낌으로 그리고 있다. 가난의 기억이란 동질감을 가진 준혁과 달리 민혁과 진아는 더욱 먼 계층적 간극을 가진 느낌이다. 준혁이 7세 지능을 가졌을 때는 오히려 그 사랑은 적어도 자유롭게 표현되기는 했었다. 준혁의 지능 퇴화는 계층이라는 허울이 없을 때 사랑의 순수성을 보여주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김 PD는 어린아이와 어른이 다를 것 없다는 점, 때로 어른은 어린아이보다 못하다는 것, 어린아이가 오히려 어른을 상처 입힐 때도 있다는 등 아이 속의 어른 혹은 어른 속의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오랫동안 빈번하게 해왔다는 점은 눈여겨 볼만하다.
 남들보다 두 박자 느린 기타리스트 장율과 노씨 집안의 막내딸 노수영의 사랑 또한 애잔하다. 부잣집 딸로 태어나 부러울 것 없이 자란 노수영은 애인 장율을 버리고 자신의 레벨에 맞는, 드라마에 나올 것 같은 매너 좋고 세련되고 스펙 우수하며 잘생긴 새 남자친구를 만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도 금세 질린 노수영은 어느 날 조용히 장율을 다시 찾아오고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녀에게 보고 싶었다고 말한다.
 노수영이 흔들리는 이 같은 묘사가 없었다면 장율과 노수영의 사랑은 지나친 판타지로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이 드라마는 두 사람을 통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이라는 강렬한 메시지를 담백하게 전한다.
 가난한 남성과 부유한 집안의 여성의 사랑이란 어느 순간 지상파에서 찾기 힘든 구도가 됐다. 여성은 남성이 보호하고 책임지는 존재라는 암묵적 가치관 속에서 혁명적인 개인이 아닌 이상, 남성도 여성도 순응하기 마련이다. 물론, 이 같은 낡은 가치관은 여성도 남성도 억압하는 것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그 억압에 대해 반발해봐야 뭐하겠는가. 현실은 변하는 것이 없는데. 그래서 안방 드라마들은 비판과 반성보다는 판타지를 생산해낸다. 위안이나 주자는 것이다. 드라마들은 힘 있고 부유한 남성을 만나 구원받는 여성을 그리는데 열정을 쏟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것은 잘 팔리는 판타지다. 하지만, ‘감자별’은 비주류적인 판타지를 선택했다. 사랑만으로 남성을 선택하는 여성은 오늘날 청춘들에게 사라진, 하지만 그래서 아름답고 가치 있는 꿈이다. 기성세대에게 한심하기 짝이 없겠지만, 물욕도 명예욕도 없는 오늘날 대다수 청춘을 대변하는 장율은 사랑 때문에 음악을 포기한다든지 하는 구세대적 제스쳐를 취하지 않는다. 수영 또한 이를 강요하지 않는다. 역할론을 벗어던지고 인간과 인간의 눈으로 사랑하는 이들의 모습은 비록 판타지라 할지라도 확대 재생산할 가치가 있는 진보적 세계관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