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부삼 기자 2012.08.20 16:05:27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경선 후보가 20일 압도적인 표 차이로 상대 후보들을 제치고 세번째 대권 도전에 나서게 됐다.
박 후보는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과 고(故) 육영수 여사의 맏딸로 지난 1952년 경상북도 대구에서 태어나 5·16 군사쿠데타 이후 1961년부터 청와대 생활을 시작했다. 그가 9살 때였다.
그는 장충초등학교와 서울 성심여고를 졸업한 뒤 서강대학교 전자공학과를 나왔다. 이후 1974년에는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으나 그해 8월15일 광복절 기념식에서 어머니가 피살당해 퍼스트 레이디로서의 삶을 살게 된다.
박 후보는 이 때부터 선친 곁에서 국정 운영을 배웠으며 청와대 직원들의 보고를 메모하는 습관은 이 당시부터 생긴것으로 알려졌다. '수첩공주'라는 별명을 얻는 단초가 된 것이다.
이후 1979년 10월26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박 전 대통령이 서거한 후에는 '독재자의 딸'로 몰려 사실상 은둔생활을 해야 했다.
그는 이 당시에 권력의 최정상에 있을 때 가깝다고 믿었던 측근들이 한 순간에 등을 돌리는 경험을 겪었다고 알려졌다. 그가 '약속'과 '신뢰'를 강조하는 이유다.
박 후보가 40대 초반이던 1993년 출간된 자신의 저서 '평범한 가정에 태어났더라면'에 실린 1989년 11월3일자 일기에서는 "권력이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정말 두려운 것"이라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성실하고 진실한 사람이다. 겉과 속이 다르지 않고 소신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친근감을 갖고 대하게 된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처럼 '영욕의 삶'을 걸어온 박 후보가 마침내 '청와대 주인'이 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은둔의 독재자 딸'에서 유력 정치인으로
그가 정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지난 1997년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대선 후보를 도우면서 부터다. 그는 이듬해인 1998년 대구 달성 보궐선거에서 출마해 당선됐다.
'은둔의 독재자 딸'에서 정치인으로 화려하게 등장한 것이다.
그는 정계에 입문한 지 2년 후인 2000년에는 한나라당 부총재로 선출되는 등 중앙 정치에서도 활동폭을 넓히며 유력 정치인으로서의 위상을 다져나가기 시작했다.
박 후보는 또 2001년 12월10일 대구에서 기자 간담회를 갖고 "정치개혁을 이루기위해 경선에 참여하는 쪽으로 결론을 내릴 것"이라며 처음 당내 경선 출마를 공식화하며 첫 번째 대권 도전에 나섰다.
그는 당시 이회창 총재가 당을 운영하고 있을 때 대권 도전에 나서며 당권과 대권을 분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 후보는 1인 보스체제의 대안으로 집단지도체제의 도입을 요구키도 했다. 또 그는 당시 경선 룰에 대해서도 "시대흐름에 맞게 바꿔야 한다"며 국민참여경선제 도입을 요구했다.
◆첫 대권 실패 뒤 탈당 복당 겪고 재 도전 나서
하지만 박 후보의 이 같은 요구는 당을 장악하고 있었던 이 총재가 받아들여주지 않았고 그는 다음해인 2002년 3월 한나라당을 탈당하게 된다.
탈당한 박 후보는 한국미래연합이란 이름으로 비(非) 정치권 인사가 참여하는 신당을 창당해 정치적 입지를 굳히게 된다.
그는 이후 당시 여론조사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얻고 있던 정몽준 후보와의 단일화 추진 등 다양한 정치적 연대를 추진했으나 결국 그 해 10월에 한나라당으로 복당했다.
당내 경선에서 후보로 선출된 이회창 총재를 도와 그 해 대선을 치렀으나 민주당 노무현 후보의 돌풍으로 패배의 쓴잔을 들고 만다.
박 후보는 이어 5년 뒤인 2007년에도 대통령의 꿈을 꾸고 도전에 나선다.
그는 당시 두 번째 대권 도전을 공식 선언하는 기자회견에서 "대한민국을 바로 세워 5년 안에 선진국에 진입하는 기적을 이루겠다"며 출사표를 던졌다.
이후 박 후보는 서울 시장을 지냈던 이명박 후보와 치열한 대권 레이스를 벌였다. 이 후보는 '경제살리기'를 최우선 국가과제로 꼽으며 여론조사 지지율을 높이는 전략으로 박 전 위원장을 위협했다.
또 두 후보는 선거인단 구성에서 경선 시기와 방법, 검증 문제 등 경선 룰 전반을 놓고 의견차이를 보이며 끊임없이 갈등하는 모습도 보였다.
이후 수개월간 이어졌던 갈등의 골은 경선참여 선거인단의 국민참여 비율을 늘리는 방향으로 양측에서 합의가 이뤄져 봉합됐다.
최종 합의된 경선룰은 8월에 경선을 실시하고 선거인단은 23만여명으로 정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경선 결과가 발표되던 날 그는 결과를 보자마자 승복했고 깨끗한 승복을 통해 대중적 인기를 얻기도 했다.
이명박 대통령 임기 초기에 박 후보는 은둔생활을 택했다. 당내에서는 가장 영향력이 있는 인사였지만 청와대와의 불필요한 마찰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박 후보가 종종 정부의 정책에 대해 목소리를 더러 내기도 했다.
그는 한나라당이 세종시 수정안을 통과시키려 할 때 "국가의 새로운 패러다임은 세종시 원안"이라며 "대한민국 전체 균형 발전을 위해 함께 고민하고 노력해야 한다"면서 원칙론을 앞세워 세종시 원안 지지발언을 했다.
박 후보는 정부와 청와대의 전면적 압박 속에서도 원안을 끝까지 고수했고, 이 때부터 원칙을 지키는 정치인이라는 이미지가 부각되기 시작했다.
◆‘위기’의 한나라 구하며 화려하게 ‘부활’
그러던 그는 지난해 12월 선관위 디도스 공격, 전당대회 돈봉투 사건, 등 각종 악재로 시달리던 당을 구하기 위해 다시금 정치 전면에 등장했다.
지난 2007년 대선 경선에서 패한 뒤 당내 비주류로 오랫동안 침묵을 지켰던 박 후보는 이번 총선을 계기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4·11 총선을 진두지휘한 박 후보는 각종 악재로 인해 100석도 못 얻을 것이라는 정치권의 관측을 비웃듯 152석을 획득해 선거의 여왕임을 다시 한 번 입증했다.
새누리당은 이후 5·15 전당대회를 열고 황우여 대표 체제를 출범시켰고 박 후보는 대선에 출마하기 위한 숨고르기에 들어갔다. 이 때부터 정몽준 전 대표와 이재오 의원 등 비박계 인사들은 '박근혜 흔들기'에 착수했다.
비박계 인사들은 경선 흥행을 우려하면서 완전국민경선제(오픈프라이머리) 도입, 경선 일정 연기 등을 주장했다.
이 같은 요구에 대해 박 후보는 원칙론을 앞세워 정면돌파했다. 박 후보는 "경기의 룰을 보고 선수가 경기하는 것이지 매번 선수에게 맞춰 경기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입장을 보였다. 당 지도부도 박 후보의 원칙론에 손을 들어줬다.
정 전 대표와 이 의원이 이 같은 결정에 반발, 당내 경선을 포기했을 때 정치권에서는 새누리당 경선이 자칫 '박근혜 추대식'으로 변질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섞인 목소리를 냈다.
이 때도 박 후보는 정면돌파를 선택했다. 그는 지난달 10일 대권 도전을 공식선언하며 대선 핵심공약으로 '오천만국민행복플랜'을 내걸었다.
오천만국민행복플랜은 지금까지의 정부가 국가를 우선해 왔다면 새 정부는 국정운영에 있어 국민을 최우선시해야 한다는 내용을 기본 골자로 하고 있다.
경선 일정이 시작된 이후에도 박 후보는 묵묵히 비박계 주자들의 공세를 견뎌냈다.
김문수 후보는 박 후보의 최대 아킬레스건인 5·16 인식에 대한 공격을 집중적으로 거론했고, 임태희 후보도 박 후보의 불통 이미지를 최대한 부각했다.
또 경선 레이스 막바지에 불거진 현기환 전 의원과 현영희 의원의 공천헌금 파문은 박 후보에게 악재로 다가왔다.
야당을 비롯한 경선에 나선 비박계 후보들까지 박 후보를 겨냥해 총 공세에 나서는 모양새였다. 이 같은 공세에도 박 후보는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박 후보는 공천파문에 대해 당 차원에서 대응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며 사태를 조기 수습하기 위해 노력했다.
◆3전4기 이뤄낼지 주목
마지막까지 당내 경선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박 후보는 상대후보들을 큰 표차이로 따돌리고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로 당선됐다.
범야권의 유력한 대권 주자로 거론되고 있는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을 제외하면 그를 위협하는 요소는 없어 보인다.
향후 박 후보가 어떤 전략으로 세번째 대권 도전에 성공할 지 여부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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