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이 '보수 이념'과 '정체성'의 격랑에 휩싸였다.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이 한나라당 정강·정책에서 '보수'라는 용어를 삭제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히고 나선 것이 계기가 됐다.
최근 당내친이(이명박)계가 이재오 의원 등에 대한 '실세 용퇴론'을 제기한 김종인·이상돈 비대위원 등의 자질에 문제가 있다며 '단체행동' 배수진을 치고 사퇴를 요구한 와중에 발생해 앞으로 파장이 증폭될 것으로 보인다.
김 비대위원은 지난 4일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보수냐 중도냐 하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며 "정강·정책도 시대에 맞게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난 2006년 개정된 한나라당 정강·정책은 '지난 60년 동안 대한민국의 비약적인 발전을 주도해온 발전적 보수와 합리적 개혁의 역사적 정통성을 계승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박근혜 비대위원장도 5일 당 비대위회의에서 정강·정책 개정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나섰다.
박 위원장은 "인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정책기조와 방향을 시대변화에 맞게 재정립하느냐, 잘못된 정치 관행을 타파하고 국민소통을 넓혀 가느냐에 대한 쇄신과 변화도 추구해야 할 중요한 방향"이라고 역설했다.
하지만 홍준표 전 대표를 비롯, 친이계인 조전혁 의원, 쇄신파인 정두언 의원, 정몽준계인 전여옥 의원 등이 잇달아 반발하고 나서 분위기는 반전됐다.
홍준표 전 대표는 "부패한 보수, 탐욕적인 보수가 문제지, 참보수가 왜 문제가 되는 것이냐"라며 "이러면 당 정체성이 사라져 보수도, 진보도 아니게 된다"고 반대의사를 밝혔다,
친이(이명박)계인 조전혁 의원은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당을 살리는 길이 아니라 당을 죽이자는 주장"이라며 "한나라당에서 보수를 빼자는 주장은 어머니만 둘 있는 기형적인 가정을 만들자는 주장 만큼 터무니없는 주장"이라고 비판했다.
정몽준계인 전여옥 의원은 트위터에 "한나라당에서 보수와 반포퓰리즘을 삭제하겠다는 김종인 비대위원, 아예 한나라당 철거반장으로 왔다고 이야기 하시지"라고 표현했다.
이재오계인 장제원 의원은 "급기야 중도보수 가치마저 표에 판다니 제가 마음을 접어야겠군요. 이제 정말 떠나야겠네요"라며 탈당 가능성을 시사했다.
쇄신파인 정두언 의원은 자신의 트위터에 글을 올려 "이제는 당당하게 제대로 된 보수주의를 세울 때"라며 "(한나라당은) 사실 지금까지도 보수주의가 아니었고 '출세주의', '기득권주의'"라고 지적했다.
'원조보수'로 불리는 친박계 김용갑 상임고문 역시 뉴시스와 가진 전화통화에서 "60년 국가발전의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는 한나라당의 정강·정책을 부정하는 것은 박정희 시대를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당 정체성의 핵심인 보수를 제외하는 것은 자기 부정"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김 고문은 "충격을 넘어 허탈하다"며 "비대위가 해야 할 일은 소통과 혁신을 통해 국민의 지지를 받아야 하는 것이지, 한나라당을 파괴하고 좌파 정당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고 질타했다.
이어 김종인 비대위원을 겨냥해 "한나라당을 해체해 민주통합당에게 힘을 실어 주려는 것 아닌가"라고 비난했다.
비대위는 당내 논란이 증폭되자 급기야 이날 '보수 삭제' 문제를 추후에 논의하겠다는 쪽으로 논란을 잠재우기 애썼다.
비대위 정책쇄신분과는 이날 회의를 갖고 현재의 정강·정책에서 '보수'라는 용어를 삭제하는 것에 대한 격론을 벌였으나 결론을 내지 못했다.
박근혜 위원장은 "우리는 국민을 잘 살게 하려는 것인데 찬반논란이 되다 보면 잘못된 방향으로 빠질 수 있다"며 "국민의 피부에 와닿는 정책을 내면서 거기에 맞춰 정강·정책을 고쳐나가는 것이 국민들에게 더 와닿는 방법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 위원장은 또 "현재의 정강·정책이 국민의 염원을 담아 내기에 한계가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해 개정 추진의지를 분명히 했다.
하지만 이번 주말께 '박근혜 비상대책위원회'에 대해 불만을 가져온 이재오 정몽준 홍준표 의원과 김문수 경기도지사 등 이른바 '반박(反朴) 4인방'이 회동을 가질 것으로 알려져 이번 논란이 반박세력의 결집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