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 한지혜 기자] 미국 무역대표부(USTR)가 콘텐츠 사업자(CP)의 '망(網) 이용료' 지불을 의무화하려는 국내 입법부 움직임에 딴지를 걸고 나섰다. 관련 법안이 제정될 경우 통상 마찰 가능성이 다분하다는 보고서를 냈다. 국내에선 넷플릭스와 SK브로드밴드(SKB)가 망 이용료를 두고 법정소송을 벌이고 있다. 판결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막대한 트래픽을 유발하면서 그로 인한 수익은 고스란히 다 챙기는 글로벌 콘텐츠 공룡들에 대한 견제 움직임은 비단 우리나라만 그런 게 아니다. 유럽 지역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보고서에 이같은 우려를 표명한 건 우리 국회가 세계 최초로 구글 인앱결제횡포방지법(전기통신사업법 개정안)을 제정함으로써 글로벌 시장에서 자국 콘텐츠 기업들이 불리해졌던 전례가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도 있다. 한국의 망 이용료 관련 입법화 여부가 전세계 시장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만큼 선제적으로 대응하겠다는 취지로 읽힌다.
◆USTR "韓 망 이용료 의무화 법안, 국제 무역 의무에 우려 야기"
미국 USTR는 최근 발간한 '2022년 국가별 무역장벽 보고서'(National Trade Estimate Report on Foreign Trade Barriers)를 통해 한국의 망 이용료 부과 관련 입법 움직임에 공식적으로 우려를 표했다.
USTR은 해당 보고서의 '시청각 서비스' 부문에서 "지난해 여름 한국 국회에서는 CP가 인터넷 서비스 사업자(ISP)에게 '망 이용료'를 지불하도록 의무화하는 법안이 제출됐다"며 "이는 한국의 국제 무역 의무에 대한 우려를 불러일으킬 수 있고, 미국은 이와 관련한 한국의 입법 노력을 지켜볼 것"이라고 밝혔다.
실제 우리 국회에서는 망 이용료 의무화와 관련해 '전기통신사업법 일부개정법률안'이 지난해 수차례 발의됐다. 발의된 개정안은 일부 표현에만 차이가 있을 뿐 공통적으로 망 이용료 납부를 의무화해야 공정한 경쟁이 이뤄질 수 있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법안 발의안을 보면 ▲인터넷접속역무의 제공에 필요한 망의 구성 및 트래픽 양에 비추어 정당한 이용대가를 지급하지 아니하는 행위를 금지행위로 규율(김영식 의원 대표발의) ▲국내외 구분이나 사업의 규모와 상관없이 각 사업자가 발생시키는 트래픽에 따른 합당한 망 이용료를 지급하는 것이 공정함(이원욱 의원 대표발의) ▲정보통신망 이용·제공 계약 체결과 정당한 대가의 산정 등에 관한 사항을 규정해 인터넷망 이용 및 제공 관계에 있어 공정한 경쟁과 전기통신사업자 간 상생·발전을 위한 기반 조성(양정숙 의원 대표발의) 등의 내용이 담겼다. 이들 법안은 현재까지 모두 국회에 계류 중인 상태다.
이러한 국회의 입법은 사법부도 CP의 망 이용료 납부 의무화를 인정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면서 보다 적극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모양새다.
◆SKB vs 넷플, 1심은 SKB 손 들어줘…美 정부 우려 변수될까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망 이용료와 관련된 소송이 진행 중이다. SKB가 넷플릭스를 상대로 망 이용료를 납부하라는 소송을 제기했는데,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20부(김형석 부장판사)는 지난해 6월 열린 1심 재판에서 SKB의 손을 들어줬다. 법원이 넷플릭스가 SKB에 망 이용료 채무를 지고 있다고 인정한 것이다.
1심 판결 후 넷플릭스 측은 곧바로 항소를 제기했고, 양사는 첨예한 법정 다툼을 벌이고 있다. 지난달 16일 열린 항소심 1차 변론기일에서도 '빌앤킵'(Bill and Keep, 상호무정산) 방식 적용 여부, OCA(넷플릭스의 콘텐츠전송네트워크)를 통한 망 이용료 청산 여부 등 주요 쟁점사안을 두고 팽팽한 공방을 이어왔다.
넷플릭스와 SKB의 2차 변론기일은 오는 5월18일로 예정돼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 USTR의 공개적인 우려 표명이 '무언의 압박'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망 이용료 의무화', 유럽서도 동조…GSMA도 거든다
보고서 내용이 국내 실정과 글로벌 정서를 간과했다는 지적도 있다. 미국 정부가 지적한 한국의 국제 무역 의무, 즉 미국 기업에 대한 차별이라는 우려와 달리, 오히려 국내 CP들이 역차별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넷플릭스 등 공룡 콘텐츠 회사들로부터 망 이용료를 받고자 하는 움직임은 국내 뿐 아니라 유럽 등 해외에서도 마찬가지다.
가령, 네이버·카카오 등 국내 대표 CP들은 국내 통신사들에게 매년 망 이용료를 낸다. 네이버는 연간 약 700억원, 카카오는 약 300억원 수준의 망 이용료를 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통신사 계열사들도 마찬가지다. 해외 기업으로 눈을 돌려도 애플TV, 디즈니플러스, 메타(페이스북) 등이 망 이용료를 이미 납부하고 있거나, 납부하기로 합의했다. 현재 발의된 상당수 관련 법안들도 해외CP 뿐 아니라 국내 CP들도 트래픽 비중이 일정 규모 이상이 될 경우 대상이 되도록 규정하고 있다.
막대한 트래픽을 유발하면서도 콘텐츠 수익만 챙기는 글로벌 CP들을 상대로 망 비용분담을 요구하는 건 유럽 국가들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12월 ▲도이치텔레콤 ▲보다폰 ▲텔레포니카 ▲브리티시텔레콤(BT) ▲오렌지 ▲텔레콤오스트리아 ▲ KPN ▲비바콤 ▲프록시무스 ▲텔레노르 ▲알티체포르투갈 ▲텔리아컴퍼니 ▲스위스컴 등 유럽 각국의 13개 대표 통신사는 글로벌 CP에게 망 이용료를 내라는 내용의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들은 "네트워크 트래픽의 상당 부분이 빅테크 플랫폼에 의해 유발되고 수익화되는데, 이를 위해서는 지속적이고 집중적인 네트워크 투자와 계획이 필요하다"며 "EU 구성원들이 디지털 혁신을 누릴 수 있는 상태가 지속되려면 빅테크 기업들이 네트워크 비용을 공정하게 분담해야만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