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전 대통령의 영욕의 정치 역정
가난한 유년 시절…육사 입학 후엔 탄탄대로
5.18 강제진압…'체육관 선거'로 대통령 당선
민주화 국민적 열망에 물러나…반성은 없어
[시사뉴스 홍경의 기자] 11·12대 대한민국 대통령이자 군사독재 권력자 전두환 전 대통령이 23일 사망했다. 향년 90세.
전 전 대통령은 1979년 12·12 군사쿠데타를 통해 신군부 핵심 세력으로 한국 정치사에 등장했다. 이후 대통령이 돼 제5공화국을 이끌었다.
재임 중 국민 복지와 문화생활의 수준을 한 단계 높였으나, 5·18 민주화운동 강제진압, 학림·부림 사건 등 군사정권 유지를 위해 국가폭력을 자행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더욱이 퇴임과 사법처리 이후에도 자신의 과오에 대한 사과가 없어 지난 10월26일 서거한 노태우 전 대통령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 군사정권 권력자로 남게 됐다.
◆가난한 유년시절…육사 입학 후 탄탄대로
전 전 대통령은 1931년 1월18일 경상남도 합천군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전상우씨와 어머니 김점문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홉살이 되던 1939년, 아버지가 일본 순사를 밀친 일때문에 온 가족이 만주로 이주했다가 1941년 봄 귀국해 대구에 정착했다.
그는 대구에서 신문배달을 하면서 유년시절을 보내다가 1949년 대구공업고등학교 기계과에 입학했다. 대구공고 시절인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했다. 1951년 대구공고를 졸업한 뒤 1952년 육군사관학교 제11기 생도로 입학했다. 1955년에 육사를 졸업했다.
졸업 이후 육군부관학교를 거쳐 미국에 유학, 미국 보병학교를 수료했고 1961년 5·16쿠데타 직후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발탁돼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실 민원비서관, 중앙정보부 인사과장 등을 지냈다.
전 전 대통령은 1964년 신군부세력과 함께 하나회를 조직했다. 고 노태우 전 대통령도 이 하나회 소속이었다.
하나회와 박 전 대통령의 신임을 바탕으로 탄탄대로를 걸은 그는 1979년 국군보안사령관에 임명됐고 이는 같은해 발생한 10.26 사태 이후 그가 정치권력의 중심부에 자리잡도록 하는 기반이 됐다.
◆5.18 강제진압…'체육관 선거'로 대통령 당선
10·26 사태 직후 '서울의 봄', 그리고 이어진 전국 비상계엄과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전 전 대통령의 행적은 그의 일생에 있어 가장 중요하고도 문제적인 부분으로 평가받는다.
1979년 10·26 사태 직후 전씨는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았고, 같은해 12월12일 정승화 당시 계엄사령관 체포를 시작으로 12·12쿠데타를 주도했다. 이후 전씨를 필두로 한 신군부세력은 제5공화국의 중심세력이 됐다.
신군부는 1980년 5월17일자로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다음날부터 광주에서 전남대 학생들을 시작으로 시민들의 저항이 확산되자 신군부는 광주에 공수부대 등을 투입해 10일간 유혈 진압했다. 전씨는 당시 발포명령자로서 진압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신군부는 정권을 빠르게 장악했고, 전 전 대통령은 1980년 6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을 거쳐 같은해 8월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 간선으로 제11대 대통령에 선출됐다.
이듬해 1월에는 새 헌법에 따라 대통령선거인단 투표를 통해 민주정의당 총재로서 제12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는 취임 후 ▲민주주의의 토착화 ▲복지 사회의 건설 ▲정의 사회의 실현 ▲교육혁신과 문화 창달을 4대 국정 지표로 내세웠다. 이에 따른 ▲중임을 제한하는 대통령 단임제 채택 ▲의료보험.산재보험의 적용 범위 확대 ▲프로스포츠 확대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및 1988년 서울 하계올림픽 유치 등은 전두환 정부의 공(功)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과(過)도 뚜렷하다. 재임기간 내내 이어진 언론탄압, 학림·부림 사건, '정의 사회 실현' 명목으로 설치된 삼청교육대, 노조 해산, 우민화의 일환인 3S(스포츠·스크린·섹스) 등은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권의 어두운 면을 여실히 드러냈다.
◆민주화 열기에 물러나…반성은 없어
전 전 대통령은 재임기간 내내 민주화, 특히 대통령 직선제에 대한 국민적 요구가 이어졌다.
그러나 전두환 정부는 이를 무시한 채 여당에 유리한 체육관 선거와 야당 후보의 출마 방해 등으로 독재체제를 굳혀 갔고 1987년 4·13 호헌조치를 발표했다.
여기에 박종철·이한열 열사의 죽음이 기폭제가 돼 6월 항쟁이 전개됐고 결국 전씨는 노태우 당시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의 6·29 선언을 통해 직선제 요구를 수용했다.
그는 퇴임 후 5·18과 재임 당시 비리 문제로 인해 백담사에서 은둔 생활을 했고, 1997년에는 고 노태우 전 대통령과 함께 내란목적살인죄·군사 반란 혐의로 대법원에서 17년형을 선고받았다. 같은해 12월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 투옥 기간은 2년으로 짧았다.
출소 이후 전 전 대통령의 행적은 논란의 연속이었다. 2017년 출간한 '전두환 회고록'을 통해 5·18을 '광주사태'로 폄하하고 자신은 당시 발포 명령과는 무관하다고 선을 긋는가 하면, 5·18 당시 헬기사격을 목격했다고 증언한 고 조비오 신부에 대한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2018년부터 재판을 받았다.
966억원에 이르는 추징금을 납부하지 않은 것과 5·18 당시 강제진압을 직접 사과하지 않은 것 역시 그에 대한 국민적 평가를 악화시키는 원인이 됐다.
전 전 대통령은 2021년 8월 혈액암의 일종인 '다발성 골수종'을 진단 받고 투병 중이었다. 최근에 병세가 급격히 악화된 것으로 전해졌다.
재임기간 중 무궁화대훈장,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태극 무공훈장 등을 받았으며 '전두환 회고록' 전 3권을 집필했다. 유족은 배우자 이순자 여사와 아들 재국·재용·재만 씨와 딸 효선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