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 강신철 기자]법원이 캐나다 정유업체 하베스트(Harvest Trust Energy)를 부실 인수한 혐의로 기소된 강영원(65) 전 한국석유공사 사장에게 무죄를 선고한 것은 기업인에게 배임죄 적용을 신중하게 하는 최근 법원 판결 추세가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1조원 이상의 국민 혈세가 투입된 사업이 실패했는데도 책임을 지는 사람이 없어 국민 부담만 가중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5부(부장판사 김동아)는 8일 "구체적이고 명확한 입증 자료가 없다"는 것을 근거로 강 전 사장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강 전 사장이 하베스트 인수 당시 장래에 손해가 발생할 것을 예견할 수 있었다는 구체적인 증거가 없다는 이유에서다.
또 하베스트 인수는 정책 판단의 문제지 형사상 배임죄로 증명되기 어려운 데다, 인수금액을 평가하는데 강 전 사장이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법원이 배임죄에 대해 이처럼 엄격하게 판단한 사례는 적지 않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4부(부장판사 유남근)는 지난해 9월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이석채(71) 전 KT 회장에게 무죄를 선고한 바 있다.
당시 재판부는 "기업 경영은 원천적 위험을 내재하고 있어 개인적 의도 없이 수집된 정보를 바탕으로 이익에 합치되는 결정을 내렸다 하더라도 손해가 발생할 수 있다"며 "이런 경우까지 배임 혐의로 형사 처벌을 묻고자 한다면 죄형법정주의에 위배되고 기업가 정신 등을 위축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했다.
통영함 납품장비 비리 혐의로 기소된 황기철(59) 전 해군참모총장도 무죄를 선고받은 바 있다. 당시 법원은 "황 전 총장이 음파탐지기 구매사업 추진 과정에서 H사에 이익을 주고 국가에 손해를 주려 했다고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다"며 "업무를 벗어나거나 배임하려 했다는 데 합리적 의심이 없을 정도로 증명됐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2843억원의 배임 등 혐의로 1심에서 중형이 선고됐다가 항소심에서 집행유예가 선고된 강덕수(66) 전 STX 그룹 회장 사건, 회삿돈을 횡령하고 해외에서 상습 도박을 한 혐의로 1심에서 실형이 선고된 장세주(63) 동국제강 회장 사건에서도 법원은 일부 배임 혐의에 대해 증거 부족을 이유로 무죄로 판단했다.
법조계 관계자는 "사후적으로 배임죄를 적용할 경우 기업활동을 위축시킬 수 있다는 지적이 계속 나오면서 법원도 이 같은 추세를 따라가는 분위기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경우 손해가 발생하더라도 책임을 물을 수 없어 "법원이 지나치게 소극적으로 배임죄를 판단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강 전 사장은 지난 2009년 10월 캐나다 자원개발 회사 하베스트를 인수하는 과정에서 부실 계열사인 노스아틀랜틱리파이닝(NARL·날)을 시장 평가액보다 높은 가격에 함께 사들여 석유공사에 손실을 입힌 혐의로 기소됐다.
당시 석유공사는 날을 시장 가격보다 5500억원 높은 1조3700원에 사들였다. 이후 석유공사는 지난 2014년 날을 미국투자은행에 1000여억원에 매각했으나 경영사정 악화 등의 이유로 실제 회수한 금액은 329여억원에 불과한 것으로 조사됐다.
한 검찰 관계자는 "법원이 배임죄 인정에 있어서 지나치게 소극적인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며 "이에 따라 국고 손실에 대한 책임 소재가 불분명하게 된 점도 아쉬운 부분"이라고 말했다.
법무법인 은율의 손동환 대표변호사는 "법원에서는 배임죄라는 형사책임에 대해 엄격한 증거를 요구하는 경향이 있다"며 "하지만 손실 규모를 고려하면 지나치게 엄격한 증거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닌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형사 책임이 무죄가 나도 이와 별개인 민사 책임이 면책되는 것은 아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