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은 이미 세계적인 문화유산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토록 세계적인 아리랑이 국내에서는 무관심 속에서 자라고 있다는 현실이다. 아리랑은 민족의 잠재된 정서지만, 국가적으로 아리랑의 가치를 파악하고 이용하려는 노력은 부재하다. 재외한인 예술가들은 “세계인에게 확실히 각인 되어 있는 아리랑을 왜 브랜드화 하지 않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입을 모은다. 아리랑을 세계로 상품화하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아직은 시행착오가 많은 초급 단계다. 무엇보다도 ‘아리랑 사업’이 대체로 아리랑에 애정을 가진 개인이나 소규모 단체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도 문제다. 기업적인 전략이 부족해, 재정난이나 구조적 한계에 자주 부딪치는 것이다. 아리랑을 상품화하는데 가장 효율적인 분야는 역시 문화상품이다. 아리랑의 문화상품화로 성공한 대표적 사례가 리틀엔젤스다. 리틀엔젤스는 80년대부터 딱히 아리랑이라기보다는, 전통문화를 소재로 각국을 돌며 공연을 해왔다. 이외에도 김경원씨의 퍼포먼스 ‘정신대 아리랑’, 최동국씨의 아리랑 대중가요, 내셔날심포니오케스트라의 관현악곡 아리랑 등이 일본에서 성황리에 공연됐다. 최동국씨는 “왕복 교통비와 공연료를 받고, 현지에서 CD도 꽤 팔
아리랑 중에 가장 남성적이고 도전적인 노래가 밀양아리랑이다.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와이리 좋노 와이리 좋노’ ‘아리당다쿵 아리당다쿵’ 같은 반말조의 흥겨운 후렴구는 경상도 지방 특유의 활달함을 엿볼수있다. 리듬이 빠르고 힘있고 경쾌한 것이 밀양아리랑의 특징이다. 밀양의 아랑전설은 아리랑의 기원으로 거론되는 만큼, 밀양아리랑의 유래로 절대적인 인정을 받고 있다. 밀양 사또의 외딸 아랑은 미모가 뛰어나 재주 또한 많았다고 한다. 그녀를 사모한 젊은 통인은 아랑을 유인해 사랑을 고백했다. 아랑이 이를 단호히 뿌리치자 통인은 그녀를 죽이고 만다. 억울한 죽음을 당한 아랑은 부사 앞에 넋으로 나타나 결국 원한을 푼다. 목숨을 걸고 정절을 지킨 아랑의 숭고함은 지역주민에게 깊이 각인 되어 아리랑을 낳았다. 실제 밀양에 가보면 영남루 대밭속에 아랑각과 비석이 있으며 지역의 연례 문화 행사로 아랑제를 5월 상순에 4일간 개최한다. 아랑전설이나 밀양아리랑이 밀양 지역주민과 정서적으로 얼마나 긴밀한 관계인지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영화 서편제에서 고개를 넘어가면서 부르는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이라는 곡조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한때 진도아리랑 배우기가 유행하기도 했다. 영화의 여파였겠지만, 진도아리랑의 어깨를 들썩이게 하는 신명은 현대인에게도 분명히 유효하다.진도아리랑도 기원에 대해서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청산별곡에 있는 ‘얄리얄리 얄라성 얄라리 얄라’ 같은 형태의 여음이 압축 변모됐다는 전남대학교 정수익 교수의 여음설과 인명유래설, 지명유래설, 설화유래설 등이 그것이다.전설도 재미있다. 진도의 한 당골에 세습 박수가 되는 것을 비관한 총각이 있었다. 총각은 혼인을 약속한 사랑하는 처녀가 있었지만 다른 지방으로 도망가 버린다. 어느 양반 집에 머슴을 산 총각은 주인집 처녀와 눈이 맞는다.사실을 알게 된 주인집 부모가 둘 사이를 반대하자 총각과 처녀는 집을 나와 진도로 들어왔다. 총각의 부모는 양가집 며느리를 맞게 되었다고 좋아했지만, 혼인을 약속했던 처자는 총각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처녀가 원망의 심정을 담아 부른 노래가 진도아리랑이라고 한다. ‘왜왔던고 왜왔던고 울리고 갈 길을 왜왔던고’라는 가사는 전설과 절묘히 조응된다.진도아리랑은 사
아리랑의 발생지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아리랑의 문화적 경제적 가치가 인정받으면서, 한때 발생지와 연루된 분쟁도 있었다. 아리랑은 지역마다 가락이 다르며 발생역사도 다르다. 강원도 일대에 분포되어 있는 ‘정선 아리랑’, 호남지역의 ‘진도 아리랑’, 경상남도 일원의 ‘밀양 아리랑’을 묶어서 3대 아리랑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중에서 현재는 대체로 정선을 발생지로 본다. 정선 지역을 중심으로 노랫말 수가 집중적으로 나타나며, 원형성이 짙다는 것이 그 근거다. “어렸을 적 살았던 곳은 외진 곳이었는데, 그때 안팎으로 들렸던 소리가 정선아리랑이었다.”는 김병하씨(정선아리랑 기능보유자)의 말은 정선 지역에서 아리랑이 얼마나 널리 불렸는지를 대변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고개로 나를 넘겨주게“의 정선아리랑은 500여년전인 조선조 초기부터 불리워졌다고 알려져 있다. 고려왕조가 망하자 당시 고려 충신들은 정선 땅 남면으로 은거해 왔다. 그들이 충절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의 심정을 담아 읊은 것이 현재 아리랑의 효시가 되었다고 한다. 반면, 정선지방의 토착민요를 고려 유신들이 차용해 불렀다는 설도 있다. 정선은 80% 이상이 산악지대에다가 기후조건도 좋지 않아
아리랑은 세계 유례없이 오래간 다양하게 전승된 노래다. 아리랑의 종류는 확인된 것만 해도 약 50여종 3천여 수. 전국적으로 분포되고 있는 이 노래는 하지만 시작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학자들은 아리랑의 기원에 관한 여러 가지 의견을 제시했지만, 어느것도 확실치는 않다. 통상 아리랑의 유래는 다음 세 가지 정도가 대표적이다. 첫째는 밀양의 영남루에 얽힌 아랑의 전설에서 유래했다는 견해로, 밀양아리랑의 전설이기도 하다. 아랑이라는 이름의 처녀를 기리기 위해 ‘아랑 아랑’하고 부른 것이 아리랑으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다음은 알영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비 알영을 찬미한 ‘알영 알영’의 노래가 아리랑으로 변했다는 설이다. 알영설에 의존한다면, 아리랑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이미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아리랑의 기원을 근대로 보는 견해도 있다. 흥선대원군 시절 경복궁 중건때 백성들을 상대로 원납금을 가혹하게 징수했는데, ‘원납금 내라는 소리도 듣기 싫다’는 의미의 ‘아이롱’(我耳聾)이 노래가 되었다는 설이다. 이밖에도 경복궁 공사에 부역 온 인부들이 고향에 두고 온 처자를 그리워하며 ‘아이랑’(我離娘)을 불렀다거나, 고향을 떠나 있기가 힘들다는 뜻의
아리랑이 민족의 노래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한민족에게 애환의 노래이자 고난의 노래인 아리랑은 세계인에게도 수용되는 보편적 매력을 갖고 있다. 김연갑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는 아리랑을 완벽한 노래라고 표현했다. 어떤 노래가 전승되려면 구조와 기능의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 아리랑은 그런면에서 최상이다. 구조상 익히기 쉽고 자신의 생각을 반영시키기 용이한 형식이다. 또한, 받침이 없고 ‘ㅇ’ 발음이 많기 때문에 외국인들도 쉽게 따라할 수 있다. 정서를 수용하고 노동력을 원활하게 하며 감정을 해소하는 등 기능도 다양하다. 스위스 세계선가에는 아리랑이 룰러바이(자장가)로 소개되어 있다. 그리고 “이 노래는 해일이 밀려와도 어머니의 품에서 잠들 수 있을만큼 포근한 노래다.”라는 설명이 덧붙여져 있다. 김 이사는 ‘아리랑’이라는 3음보가 태생적으로 안정감을 준다고 밝혔다. 아리랑은 한마디로 정의 내릴수 없는 매력을 지닌 노래다. 분명한 것은, 아리랑은 대단한 ‘힘’을 지닌 노래라는 것이다. 민족의 역사와 함께 해온 질긴 생명력의 노래이자, 분단된 조국을 하나로 묶어주는 노래, 한민족을 상징하면서도 한반도를 훌쩍 넘은 노래가 아리랑이다. 아리랑은 영화,
[시사뉴스 정춘옥 기자] 아리랑은 한민족의 정체성을 단적으로 표현하고 확인하는 노래다. 정체성의 확인은 자연스럽게 민족의 결속력을 강화시킨다. 해외 교민들은 조국을 원망하고, 그리워하면서 아리랑을 불렀다. 그들은 아리랑을 통해 민족혼을 채찍질하고, 세계에 민족의 존재를 알렸다. 해방 직후 혼란기에 아리랑이 애국가 대신으로 불렸던 것도 아리랑이 민족의 상징이자, 연대성을 지닌 노래이기 때문이다. 김연갑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는 “눈물과 기쁨, 슬픔 등 모든 감정을 공유할수 있는 놀라운 대동성을 지닌 노래가 아리랑이다.”고 말했다. 뉴질랜드 교민회장에 의하면, 북한주민들이 뉴질랜드 교민을 상대로 북한 상품을 파는데, 이때 아리랑을 부른다고 한다. 아리랑은 연대성을 강조하는 메시지 그 자체인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했을 때, 만경대 학생소년궁전에서의 축하 공연과 두 차례의 만찬에서 아리랑이 등장했다. TV에 방영된 북한의 아리랑을 들으며 많은 사람들이 가슴 뭉클함을 경험했을 것이다. 2000년 9월 개최된 시드니 올림픽에서는 남북한선수가 아리랑과 함께 입장해 기립박수를 받았다. 김 이사장은 “아리랑은 민족의 노래인데 북한과의 소통에 한계가 있다는
일제치하가 시작되면서 아리랑의 저항성은 정점에 이른다. 1926년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에서는 “싸우다 싸우다 아니되면 이 세상 천지에 불지르자”는 저항의 아리랑을 노래했다. 이 영화를 계기로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는 경기아리랑은 본조아리랑으로 불리며 아리랑의 전범으로 자리잡았다. 최근들어 나운규의 아리랑은 일본음악의 논리에 맞춰진 것으로, 전통가락을 훼손시켰다는 문제제기가 있지만, 이 노래가 민중의 가슴에 저항의 불씨를 당긴것만은 사실이다. 김연갑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에 의하면, “날좀보소 날좀보소”의 밀양아리랑도 흥에 겨워 불리워졌던 노래만은 아니다. 3.1운동 당시 일본 경찰의 총격 앞에서 1만4천여명의 백성이 얼싸안고 외쳤던 노래가 밀양아리랑이었다는 것이다. 광복군 아리랑이나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항일가사를 거꾸로 불렀던 정선의 ‘거꾸로아리랑’ 등 일제강점기에 아리랑은 저항의 노래로 꽃피었다. 재미있는 것은 60-70년대 일본 형무소에서 가장 많이 불러진 노래가 아리랑이라는 것이다. 일본의 사회학자가 쓴 ‘저항의 노래’라는 책에 명시된 내용이다. 김 이사장은 “저항의 뜻을 알고 그들이 부른
아리랑은 민중의 감정을 담는 그릇이었던 만큼, 시대의 바로미터가 됐다. 대원군 정권기에는 세도정치를 비아냥거려 “이씨의 사촌이 되지 말고 민씨의 8촌이 되려므나”는 노랫말이 유행했는가 하면, 구한말에는 조정의 외세를 경고해 “아라사 아차하니 영국은 영글렀네. 미국놈 믿지말라 일본이 일등이다”는 이른바 ‘아미일영가’가 널리 불리기도 했다. 또한, 1905년의 을사조약, 1910년의 한일병탄조약으로 대한제국이 멸망할때 민중들은 “백성을 버리고 가시는 님군은 발병이 난다”고 노래했다. 심지어 천연두 예방주사를 알리기 위한 ‘종두아리랑’, 문맹퇴치와 한글 보급을 위한 ‘한글아리랑’ 같은 계도적 아리랑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일제시대 총독부도 집권에 이용하기 위해 아리랑에 대해 세밀한 조사를 했다. 결과적으로 총독부는 대동아전쟁에 총력을 다하라는 내용의 ‘비상아리랑’을 보급했다. 비록 부정적 용도로 아리랑이 이용됐지만, 아리랑의 파급력을 일본도 간파했던 것이다. 아리랑은 이처럼 민중의 역사였고, 민중의 ‘지하방송’이었다. 때문에 필연적으로 아리랑은 민중의 투쟁사이기도 하다. 정선아리랑 중에는 조선창업과 이성계정권에 대한 반발을 읽을 수 있는 노래도 있다. 동학군들의 아
[시사뉴스 정춘옥기자] 한민족이 있는 곳에는 어디서든 아리랑이 있다. 남북한이 공동으로 인정하는 유일한 노래가 아리랑이고, 125개국 전 교민사회에도 아리랑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한민족만이 아니다. ‘코리아’를 모르는 외국인도 아리랑은 안다. 120여개국의 교과서에 아리랑 악보가 실려있고, 독일아리랑, 스위스아리랑, 몽고아리랑 등 새로운 아리랑이 각국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2012년 아리랑은 유네스코 세계인류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했다. 아리랑은 한민족의 노래이면서 세계인의 노래인 것이다. 한국의 영토는 한반도로 국한되지만, ‘아리랑문화영토권’은 끝없이 확장되고 있다. 그동안 아리랑은 공기처럼, 지나치게 가깝기 때문에 소중함을 알지 못하는 존재였다. 아리랑의 의미와 성격“아리랑은 조선 어디서나 들을수 있다. 그리고 조선인에게 아리랑은 쌀과 같다.”1986년 H.B. 헐버트 선교사는 잡지 ‘코리안 리포지토리’(Korean Repository)를 통해 아리랑을 이렇게 설명했다. 또한, 직지사 방장 관응큰스님은 “아리랑은 배달의 진언(眞言)”이라했고, 시인 고은은 “한국인의 만다라”라고 말했다. 한민족에게 아리랑은 존재 그 자체라고 할수있다. 교과서에서 배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