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 유한태 기자]정국 정상화가 이뤄지면서 정치권이 그동안 미뤄뒀던 개헌 논의에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내년에는 총선-대선-지방선거 등 특별한 선거가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개헌을 논의하기에 지금이 최적기라는 이유에서다. 각종 여론조사 결과를 통해서는 이미 개헌에 대해 여야 정치인들은 물론이고, 국민적 공감대까지 형성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언제든 마음만 먹는다면 개헌 논의가 시작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라는 의미다. 그런데, 이 같은 개헌 논의에 대해 유독 박근혜 대통령만은 반대 입장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경제 살리기에 집중해야 할 시기, 개헌 논의가 사회의 모든 이슈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돼 버릴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결국 박 대통령은 이 같은 우려심리를 직접적으로 밝히고 나섰고, 이에 정치권은 대통령이 국회 입법논의마저 가이드라인을 두려 한다며 거세게 반발하고 있는 상황이다.
◆朴대통령 사실상 개헌 반대 입장에 정치권 발끈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6일 오전 청와대에서 수석비서관회의를 주재하며 “지금 우리에게는 그 어떤 것도 경제 살리기에 우선할 수가 없다”며 “경제회생의 골든타임이 얼마 남지 않았고 국민안전과 공직사회 혁신 등 국가대혁신 과제도 한 시가 급한 상황”이라고 언급했다.
그러면서 박 대통령은 “장기간 표류하던 국회가 정상화돼서 이제 민생법안과 경제 살리기에 주력해야 하는데, 개헌 논의 등 다른 곳으로 국가 역량을 분산시킬 경우 또 다른 경제의 블랙홀을 유발할 수 있다”며 개헌 논의 반대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박 대통령은 거듭 “올해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국회도 경제 살리기와 국민들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것을 국정의 최우선 순위로 삼아서 함께 힘을 모아주길 부탁드린다”고 당부했다.
박 대통령의 이 같은 ‘개헌 논의 불가’ 입장에 여야 개헌론자들의 반발은 거세졌다.
박 대통령이 지난 6일, 최근 정치권을 중심으로 재점화 되고 있는 개헌 논의에 대해 제동을 걸고 나선데 대해 여야 개헌론자들의 반발이 거세게 일고 있다. 정치권 대표적 개헌론자로, ‘개헌 전도사’로까지 불리는 새누리당 이재오 의원은 즉각적으로 “개헌은 찬반의 문제이지, 시기의 문제로 본질을 호도하면 안 된다”고 박 대통령을 비판했다.
이 의원은 이날 오후 자신의 페이스북에 ‘개헌에 대한 이해’라는 글을 올려 “개헌은 제왕적 대통령제가 지금은 국가 경쟁력에 장애적 요인 중 제일 크다는 것”이라며 “개헌은 특정 정파나 특정 정당의 이해관계가 걸린 문제가 아니라, 국가개혁과제의 핵심 과제인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개헌은 경제 살리기나 일자리 창출과 국정수행에 블랙홀이 아니라 정부와 국회가 역할 분담해서 하는 것”이라고 박 대통령 주장에 정면 반박했다. 이어, “현 정부는 임기 내내 경제 살리기에 매진해야 한다”면서도 “국회는 이미 개헌 발의선, 의결선을 넘었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논의 시기는 빠를수록 좋다. 개헌특위가 구성되면 모든 논의는 절차대로 하면 된다”고 주장했다.
새정치민주연합은 “대통령의 국회 간섭”이라며 비판했다. 유기홍 수석대변인은 이날 오후 현안브리핑에서 “개헌추진 국회의원 모임에 152명이 참여하고 있고, 오늘 한 언론사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231명의 국회의원이 개헌에 찬성한다는 보도가 있다”며 “이러한 상황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일방적으로 개헌논의를 비난한 것은 대단히 부적절한 일이다. 이러니 제왕적 대통령제를 개헌해야한다는 주장이 힘을 받고 있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유 대변인은 그러면서 “국회가 헌법 문제를 논의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더구나 개헌의 필요성은 1987년 개헌이후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다”며 “여야의 중진과 다수의 국회의원들이 시대변화에 따른 개헌의 필요성을 진지하게 논의하는 것을 대통령이 응원하기는커녕 정치적 색안경을 끼고 무조건 안 된다고 비판하는 것은 대통령으로서 적절한 발언이 아니다”고 일갈했다.
특히, 유 대변인은 박 대통령의 ‘개헌 논의 불가’ 입장 외에도 “최근 국회와 정치권에 대한 불만과 비판을 계속 쏟아내고 있다”며 “대통령이 국회를 간섭하고 지시하면 안 된다. 대통령이 ‘오더’를 내리면 정쟁과 갈등의 원인이 된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유 대변인은 “박근혜 대통령이 무조건 안 된다고만 하지 말고, 국회의 진지한 개헌논의에 대해 지켜봐주시고 의견을 주시는 것이 현명하다”며 자중을 당부했다.
◆김무성 등 ‘속도조절론’, 정기국회 이후 내년 초?
한편 박 대통령의 ‘개헌 논의 반대’ 입장에 따른 정치권 반발이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를 중심으로 속도조절론이 제기되고 있어 주목된다. 조속히 개헌을 추진해야 한다는 입장이면서도 박 대통령의 입장까지 고려한 ‘속도조절론’인 것이다. 이와 관련, 김 대표는 최근 공개석상 등 다양한 곳에서 개헌 논의를 하려면 2014년 정기국회 이후에 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김 대표는 “지금 100일 동안 할 것을 70일 동안 해야 하는데 그럴 여가가 어딨느냐”며 “(개헌 논의는) 이번 국회가 끝나고 해도 늦지 않다”고 강조했다. 앞서, 세월호 정국이 마무리 되는대로 즉시 개헌 논의에 들어가야 한다고 했던 입장에서 다소 미뤄진 것이다. 이재오 의원 등 당내 비주류 진영에서 박근혜 대통령에 반기를 들고 확산되고 있는 조기 개헌 입장과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김무성 대표의 이 같은 입장에 김태호 최고위원도 거들고 나섰다. 김 최고위원은 개헌 논의와 관련해 “정기국회부터”를 제안했다. 김 최고위원은 8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최고중진연석회의에서 “이번 정기국회만이라도 경제 살리기에 여야가 올인하는 모습이 먼저라고 말씀드리고 싶다”며 이 같이 제안했다.
김 최고위원은 “지금 국회에 계류돼 있는 경제활성화법안, 민생법안을 여야가 쿨하게 합의해야 한다”며 “그리고 국회선진화법이 규정하고 있는 법적 기한인 12월2일까지 내년도 예산안이 말끔하게 통과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이런 모습을 먼저 보여줘야 된다”며 “그 다음에 개헌에 관해 이미 여야가 조언한 안을 가지고 개헌특위를 구성해 조용하게 합의해나가면 된다”고 말했다. 김 최고위원은 이어, “이렇게 하는 모습을 국민이 볼 때 저희들에게 신뢰와 성원을 보낼 것”이라며 “개헌 논의에 관해 대통령께서 ‘블랙홀이다’ 말씀하시는데, 그에 대한 우려도 아마 불식되고 인식도 바뀔 것이라 믿고 있다”고 말했다.
김 최고위원은 또, “모 언론기관에서 국회의원 300명을 대상으로 개헌에 대한 필요성에 대해 물어 249명이 응답했고, 그 중 93%가 찬성했다”며 “사실상 대통령께서도 개헌의 필요성에 대해 충분히 알고 계시리라 믿고 있다”고 개헌 자체에 대해서는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는 거듭 “이번 정기국회만은 오로지 경제 살리기에 올인해 정부가 경제 살리는 환경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도록 최대한 힘을 모아주실 것을 당부드린다”고 호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