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세간에 유관순열사에 관한 논란이 일고 있다. 발단은 2014학년도 한국사 교과서 8종중 금성. 미래엔. 천재교육. 두산동아 등 4개사 출판 교과서 3.1운동사편에 유관순을 누락시킨 사실과 춘천교대 김정인 교수의 유관순은 친일파가 만들어 낸 영웅이라는 발언으로 큰 파문이 야기되었다.
이에 관해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장으로서 2013년 12월 10일 “통탄한다 즉각 시정하라”는 성명을 발표하여 시정을 요구했고, 김정인 교수의 3차에 걸친 사죄표명이 있었지만 순국열사를 폄훼 모독하여 많은 국민의 분노와 의아심을 동시 유발한 중죄는 결코 면죄될 수 없으며 끝까지 책임을 져야한다고 천명한바 있다. 차제에 유관순기념사업회장으로서 많은 국민들께서 익히 알고 계시는 일이지만 “왜 유관순은 진실되고 위대한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되어야 하는 가?”에 대한 소견을 밝히고자한다
첫째, 유관순은 17세 여학생로서 아우내만세운동을 주동한 영웅이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당시 유관순은 17세 이화학당의 재학생으로서 서울의 탑골공원 만세운동에 참가했을 뿐 아니라 3월 5일 학생 만세운동에 가담했다가 경찰에 연행된바 있고 휴교령이 내리자 고향인 충남 천안 병천으로 귀향하여 56세인 지방유지 조인원(조병옥박사의 부친)씨와 45세인 숙부 유중무씨등과 거사를 협의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라운 일이다.
당시 3.1운동의 여파로 남성들에 대한 왜인들의 감시가 심하여 여성인 유관순이 연락책을 맡게 되었다. 여인들의 대외활동이 극히 제한되었던 시절 머리에 수건을 쓰고 인근은 물론 진천. 청원. 연기에 이르기까지 도보로 수십개 마을 유지들을 밤낮없이 찾아다니며 거사 동참을 얻어낸 사실 또한 초인적인 쾌거다.
전화도 없던 시절 사전 연락도 없이 낯모르는 어린 소녀가 마을 어른을 찾아와 만세운동 거사 동참를 요청 했을 때 얼마나 황당 했겠는가?
그러나 평소 유지들 마음에 독립에 대한 욕구가 간절했고 유관순 소녀의 불꽃같은 설득이 주효해서 1919년 4월 1일(음력 3월 1일l) 아우내장터에서 3,000여명이 운집한 가운데 대한독립만세가 외쳐 졌다. 이 현장에서 부모님을 비롯한 19명이 사살되고 30여명의 중상자가 발생했다.
유관순은 더 큰 희생을 막기 위해 일본 헌병들 총구를 몸으로 막아섰다.
영웅이 아니고서야 어찌 어린 소녀가 해낼 수 있는 일인가? 이 일로 유관순은 공주지방법원에서 민족대표 손병희 선생의 3년형보다 더 많은 5년형을 받았고 경성 복심원에서 3년형으로 감형되었다. 이때 조인원 유중무씨 등은 상고하였으나 유관순은 조선천지 감옥 아닌 곳이 어디 있느냐면서 상고를 포기했다. 얼마나 위대한 결단인가? 이래도 친일파가 만들어낸 영웅이라 하겠는가? 유관순은 영웅중의 영웅이다
둘째, 유관순은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중만세운동을 주동한 영웅이다
유관순열사는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중에도 수시로 대한독립만세를 불러 혹독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굴하지 아니함에 재소자들에게 큰 감동 감화를 일으켜 3.1운동 1주년인 1920년 3월 1일 정오를 기하여 서대문형무소 재소자 3,000여명이 일제히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옥중만세운동을 주동했다.
인류 역사상 간혹 형무소 내에서 폭동. 폭파. 집단탈주 등의 사건은 있었으나 약소민족이 평화적으로 자기나라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했다는 기록은 전무후무한 일 일 것이다. 위대한 영웅으로 칭송 받고도 남음이 있다.
셋째, 기미독립선언서를 신명을 받쳐 구족시킨 불세출의 영웅이다
유관순열사는 기미독립선언서의 알파요 오메가라 할 “오등은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유민임을 선언하노라”라는 서구(序句)와 공약 3장인 최후의 1인까지 최후의 1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는 결구(結句)를 신명을 받쳐 구족(具足)케 한 불세출의 영웅이다.
하나, 그는 일본헌병대 취조와 재판정에서 “내 나라 독립만세를 부른 것이 어떻게 죄가 될 수 있느냐”며 항변함으로써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유민임을 입증한 것이다
둘, 그는 조선의 국권을 침탈한 - “일본인에게 우리들을 심판 할 권리가 없다. 죄인으로서 심판 받지않으면 안될 것은 일본인이다.”라고 법정에서 말했다 - (- 부분은 1999년 일본 소학사회 6-상 교과서에 게재된 내용임-대판출판)
주목해야 할 것은 1차적으로 일본의 재판권을 부인한 것이고, 나아가 여기서 조선인은 우리들이라는 복수로 표현하면서 일본인은 단수로 표현한 대목에 주목해야한다. 일본인이라 함은 일본사람 전체를 의미하는 동시에 특정 1인을 지칭하는 것이다. 일본인 전체도 되고 대표하는 1인은 두 말 할 것 없이 일본천황을 의미한다.
따라서 조선의 국권을 침탈한 주범을 일본천황으로 지목하고 심판 받을 대상임을 명백히 한 것이다. 함축성 있는 17세 조선 소녀의 일본천황에 대한 촌철살인격인 단죄선언이요, 우리 민족의 속 끓는 함성을 대변한 준엄하고 통쾌무비한 우리 영웅의 대할(大喝) 이다.
이는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는 공약을 구족시킨 것이다.
셋, 유관순열사는 서대문형무소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다가 방광이 터지는 모진 고문 끝에 1920년 9월 28일 18세 피어보지도 못한 꽃 봉우리 소녀로 순국하면서도 조국에 받칠 수 있는 목숨이 하나뿐임을 안타까워했다.
이에 그의 유언 겸 기도문을 소개 한다.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코와 귀가 잘리고, 내 손과 발이 부러져도 그 고통은 잊을 수 있으나 나라를 잃어버린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수 있는 목숨이 하나 밖에 없는 것이 이소녀의 유일한 슬픔 입니다“
한 목숨 초개와 같이 조국을 위해 받친 순국선열과 호국영령들은 수다히 많았지만 받칠 목숨이 하나뿐임을 안타까워 한분은 유관순열사가 처음으로 안다.
참으로 하늘을 감동시키고도 남을 위대한 영웅의 위국 충정이라 할 것이다. 이로써 유관순은 최후의 1인까지 최후의 1각까지 공약을 구족시켰다.
단편적 이지만 이상으로 유관순열사의 신명을 다한 위국충정과 확고한 자주독립정신 그리고 정의. 자유. 평화. 존영을 추구한 3.1정신을 구현한 순국선열로서 모든 국민이 숭모하는 위대한 민족적 영웅으로 선양되어야 마땅하다고 본다.
그러기 위해서는 두 가지 현안문제의 해결책을 간곡히 제언을 하고자 한다.
첫째, 역사란 유유히 흐르다가 소용돌이를 만나거나 국난을 당했을 때 이를 타개하고 극복한 영웅이 있게 마련이다. 김유신이 삼국통일의 영웅이요, 이순신이 임진왜란의 영웅이라면 유관순은 항일독립투쟁의 금자탑인 3.1운동의 영웅이다. 이들 영웅들이 역사 속에서 찬란히 빛날 때 후손들이 그 빛을 보며 민족적 자긍심과 애국심을 발현토록 함이 역사의 교육의 목적 중 하나라 할 것이다.
우리나라 초·중·고등학교 교과서에는 반드시 유관순열사의 위업을 수록하여 후손들이 선열들을 숭앙하고 민족사적 자긍심을 가지면서 애국심이 함양되도록 선도해 줄 것과 어린 학생들의 역사인신의 혼란을 예방하기 위해서 국사교과서는 국정으로 전환해주실 것을 정부와 역사학계에 간곡히 제언한다.
둘째, 이렇듯 위대한 애국소녀 우리의 영웅 유관순열사에게 정부에서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3등급) 을 추서함으로써 매년 순국추모제에 대통령 헌화대상이 되지못하여 천안시장과 유관순열기념사업회장이 공동 주관하는 지방단위 추모행사로 치러지고 있다. 많은 국민의 가슴속에 누나요. 언니로 자리하고 계신 유열사의 추모제가 그의 고향인 천안에서 지방단위 행사로 치러진다는 사실을 국민들이 아신다면 의아해 할 뿐 아니라 국가가 유열사에 대한 예우가 소홀하다고 여길 것이다.
바라건대 정부는 유열사에 대한 훈격을 재사정하여 대통령 헌화대상 열사로 예우함이 마땅하다고 사료되어 간곡히 건의 드리는 바이다.
첨언 한다면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에서는 유관순 전기를 영어. 중국어. 일본어. 불란서어 등 4개국어로 번역해서 세계 유수대학과 도서관에 배포하여 불란서의 잔다르크 보다 더 위대한 영응으로 선양하고자 노력중인데 국내에서는 국사교과서에 실리지도 않고, 정부에서는 순국추모제에 대통령이 보내는 꽃 한 송이 없다니 기념사업회장으로서 열사의 영전에 고개를 들 수 없는 죄인의 심경이다.
열사님 너무 너무 죄송합니다. 정당한 예우가 이루어 질 때까지 부실 무능한 저를 용서치 마소서.